🧊계절이 가기 전에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꿈꾸며

📖다가오는 소문들

찬란하기에 사라질 아름다움, 보들레르의 『악의 꽃』

  지나가는 여인에게

  거리는 나를 둘러싸고 귀가 멍멍하게 아우성치고 있었다.

  갖춘 상복, 장중한 고통에 싸여, 후리후리하고 날씬한

  여인이 지나갔다, 화사한 한쪽 손으로

  꽃무늬 주름 장식 치맛자락을 살포시 들어 흔들며,

  날렵하고 의젓하게, 조각 같은 그 다리로.

  나는 마셨다, 얼빠진 사람처럼 경련하며,

  태풍이 싹트는 창백한 하늘, 그녀의 눈에서,

  얼을 빼는 감미로움과 애를 태우는 쾌락을.

  한줄기 번갯불…… 그러고는 어둠! —그 눈길로 홀연

  나를 되살렸던, 종적 없는 미인이여,

  영원에서밖에는 나는 그대를 다시 보지 못하련가?

  저 세상에서, 아득히 먼! 너무 늦게! 아마도 영영!

  그대 사라진 곳 내 모르고, 내 가는 곳 그대 알지 못하기에,

  오 내가 사랑했었을 그대, 오 그것을 알고 있던 그대여!

—샤를 보들레르, 『악의 꽃』(황현산 역), 189쪽.

• 10월 25일:   박찬일, 『어쨌든, 잇태리』 / 김형중,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
• 10월 31일:   신형철, 『인생의 역사』
• 11월 1일  :   노석미, 『매우 초록』
• 11월 5일  :   정세랑, 『덧니가 보고 싶어』

🔎책이라는 만듦새, 우리의 만짐새

난다는 책을 뜯어…

권:  이 책에서 활자체가 상당히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쓰신 활자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주시면서 이 활자체를 쓰시게 된 이유를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완:  ‘초행’(디자인: 김슬기)이라는 활자체인데요. 이 활자는 최정호 선생님께서 제작한 납활자 ‘동아출판사체’(1957) 원도를 원형으로 하고 있어요. 우리 눈에 익숙한 본문 활자는 대부분 최정호 선생님이 개발한 활자체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한글 디자인 분야에 거대한 업적을 남긴 분입니다. ‘동아출판사체’는 최정호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제작한 원도고, 실제로 동아출판사에서 『새백과사전』, ‘세계문학전집’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초행’ 활자는 (원도가 남아 있지 않기에) 정확한 형태를 알기 어려운 이 ‘동아출판사체’의 원도를 추정하고 복각해 만든 활자체라고 압니다.

권:  조형적인 것과 더불어 저는 ‘초행’이 최정호 선생님께서 처음 만드신 서체 ‘동아출판사체’에서 시작되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어요. 보들레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아주 고전적이면서도 굉장히 모던한 느낌이 나서 인상적이었거든요. 그러니까 현대시의 초석이 된 『악의 꽃』을 표현하기 위해 ‘초행’ 서체만큼 적당한 게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게다가 서체가 마냥 ‘복고적’이지 않은 것도 좋았고요.

완:  저도 처음에 납활자 원도를 원형으로 하는 활자체를 사용하면 너무 복고풍이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실제로 조판해보니 굉장히 세련됐고 정말 잘 만든 활자체라고 생각했습니다. 활판인쇄 시대의 활자 인상이 남아 있으면서도 완성도가 높은 활자였습니다. 납활자로 조판된 책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분들이 보시면 어떤 인상일까 하는 궁금함도 있습니다.

권:  행이 시작되는 지점이 행 길이에 따라 달라지도록, 짧은 행이면 더 가운데에서 시작하도록 배치하셨는데요. 기대한 효과가 있다면, 혹은 이런 배치의 장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완:  요즘 형식적으로 자유로운 시들에 비해 『악의 꽃』의 시를 보면 한 시 안에서는 행의 길이가 비슷한데요. 비교적 짧기도 하고요. 이때 가운데로 모으면 안쪽 여백이 넓어지기 때문에 읽기에 조금 편해지는 면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양쪽의 여백을 비슷하게 가져가기 때문에 안정감이 생기기도 하고, 판면 자체를 가운데 맞추었다는 점에서 가운데 맞춤의 효과, 즉 고전적인 분위기가 더해지는 면도 있습니다.

권:  확실히 정형시로 이루어진 『악의 꽃』에 적합한 배치가 아닌가 싶네요.

완: 다만 그렇기에 번역시의 경우 원시의 행 길이는 비슷했는데 번역되면서 각 행의 길이가 너무 달라진다면 이러한 형식이 효과적이지 않을 수도 있고요.

권:  『악의 꽃』의 경우 번역되었을 때도 행 길이가 비슷했는데요, 확실히 황현산 선생님께서 원시의 행 길이를 최대한 유지하려고 노력하시면서 번역하신 느낌이에요. 이 배치에 대해서 하나 더 제가 받은 인상을 말씀드리면 확실히 시각적인 리듬감이 생기는 것 같아요. 행 길이에 따라 좌우로 길이가 늘어났다 줄어드니까, 마치 전자음악 파형 이미지에서 음의 크기와 성격에 따라 파동의 진폭과 모양이 위아래로 변하는 느낌을 닮았달까요.

권:  본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하려고요. “원문에서 이탤릭으로 강조한 부분은 고딕체로, 대문자로 강조한 부분은 방점으로 표기했다.” 이 강조 원칙에 대해서 설명해주신다면요?

완:  논의 과정에서 정해진 것이긴 한데, 우선 원문의 대문자 강조나 이탤릭 강조 모두 한국어 조판 체계에서는 없는 강조 형태예요. 그래서 로마자 조판에 없는 요소를 쓰는 것이 제일 좋은 해결책이지 않을까 생각을 해왔어요. 또한 원문에서 대문자 강조가 굉장히 많이 나와요. 이 경우 자칫 잘못 강조하게 되면 시를 읽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는데, 방점 강조는 독서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강조임을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적절한 것 같습니다. 이탤릭으로 강조/변별한 부분은 이 책에서 빈도가 낮은 편이어서 이탤릭을 대체하는 일반적인 방식인 고딕체로 처리했고요.

권:  표지 이야기로 넘어가보려고요. 표지에서 한 가지 요소만 뽑자면 검은 사각형 먹박 위에 금박으로 제목과 저자명, 역자명을 표기한 디자인인 것 같아요. 이 디자인을 제안해주셨을 때 어떤 효과를 고려하셨을까요.

완:  우선 고전적인 총서 같은 느낌을 내고 싶었어요. 다만 총서라는 맥락을 없애고 봐도 검은 사각형의 틀 안에 활자가 놓였을 때 특유의 조형적 느낌도 주고 싶었고요. 제 나름 변용을 한 것인데, 이때 떠올린 것이 정병규 선생님의 『에로티즘』(죠르쥬 바따이유 지음, 조한경 옮김, 민음사, 1997) 디자인이었어요. 지금 봐도 굉장히 훌륭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이 검은 사각형 안에 갇혀 있게 되고 특유의 강조 효과도 생기는데, 이런 강렬함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권:  확실히 먹박이 배경이 되고 그 위에 금박으로 서체까지 올리니 입체감이 많이 강해지더라고요. 표지 위 다른 요소와는 완전히 다른 면에 있는 듯한 느낌이요.

권:  마지막 질문인데요. 이번 『악의 꽃』은 참 많은 층위가 있는 책이에요, 보들레르, 완역판, 황현산, 유고… 디자이너로서 이번 작업이 어떻게 다가왔는지 혹은 어떤 부분을 중심으로 작업하고자 했는지 자유롭게 얘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완:  처음 뵀을 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맡기에 많이 부담스러운, 무게감이 있는 책이라 생각했어요. 또 정말 ‘정병규 선생님이 하시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정병규 선생님께서 정말 아름다운 작업을 많이 하시기도 했고, 황현산 선생님과 굉장히 각별하시기도 했으니까요.

어쨌든 제가 디자인하기로 결정한 이후에는, (권현승 선생님도 마찬가지셨겠지만) 이 책에 누가 되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정병규 선생님께서 책마다 격이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데요. 그처럼 이 책이 가진 격, 그 무게에 맞는 디자인을 해야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닫는 문

사라짐 속에서도 머무는 것

  이슬의 계절을 지나 이제는 서리의 계절, 이마저도 곧 지나가겠죠(실제로 다음 절기가 입동立冬이니까요). 그렇게 가을의 아름다움도 우리 곁을 떠나갈 테고요. 하지만 그 모든 사라짐 속에서도 머무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아름다움을 담아두었던 시선, 그것을 음미할 수 있었던 마음 아닐까요.

  오늘 소문난다와 함께했던 시집 『악의 꽃』은 황현산 선생님께서 작고 한 달 전까지 붙잡고 계셨던 번역 원고를 난다가 유족 분들에게 건네받은 결과물입니다. 덧없는 아름다움을 오래도록 소중히 음미하는 시선, 또 당신 죽음 이후의 미래를 생각하며 그 미래를 오늘 당신의 일로 여기셨던 (황 선생님의) 마음이 함께하는 이번 소문난다였습니다.

입동立冬에 돌아올게요. 또 만나요! 🤗

• 2023 <파주북소리> 행사가 10월 27일부터 개최됩니다. 유진목 시인과 난다가 '오픈하우스' 프로그램으로 참여하는데요. 행사 전에는 탐난다 오픈하우스 기념으로 난다 플리마켓 <살판난다>가 열릴 예정입니다. 푸짐한 웰컴 굿즈(무려 젓갈 세트!)부터 두 시인의 소장품까지 풍성한 판이 벌어진다니까 모두 모여주세요!
  👉🏻 파주북소리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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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고 작가 콜린진의 첫 개인전 <콜린진의 역사적인 레고 Colin Jin's HEstorical Lego>이 내일 10월 25일(화)까지예요. 레고로 못 만드는 것이 없는(!) 콜린진 작가님의 아주 특별한 레고 아트피스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난다에서는 이번 전시를 위해 『아빠가 만들어준 레고』라는 아트북을 만들었답니다. 아트북은 전시장에서만 단독 판매중이니 하루 남은 전시 놓치지 마셔요! 👉🏻 전시 소식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