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가기 전에

잠시 머물러 오래도록 빛나는

📖다가오는 소문들

시를 읽는 가을, 포에지Poésie

  어느 날 애인들은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고 내 영혼은 우는 아이 같은 나를 달랜다 그때 나는 갑자기 나이가 들어 지나간 시간이 어린 무잎처럼 아리다 그때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모든 별들은 기억을 빠져나가 제 별자리로 올라가고 하늘은 천천히 별자리를 돌린다 어느 날 애인들은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쓰러지고 바람이 불어오는 사이에 귀를 들이민다 그리고

─허수경,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문학동네포에지045), 21쪽.

• 10월 8일  :   권민경 외 『마음과 엄마는 초록이었다』
• 10월 15일:   장우철 『여기와 거기』
• 10월 20일:   이로 『어떤 돈가스 가게에 갔는데 말이죠』

🔎책이라는 만듦새, 우리의 만짐새

난다는 책을 뜯어…

  『가기 전에 쓰는 글들』은 2018년 우리 곁을, 그러나 아주 멀리는 아니고, 그렇게 잠깐처럼 떠난 허수경 시인의 유고 산문입니다. 시로 갈 시와 글로 갈 글, 그 태생과 성장과 말년을 엿볼 수 있는 시작 메모들. ‘가기 전에 쓰는 글들’이라는 제목은 2019년 1월 3일 독일에서 한국으로 도착한 노트 한 권의 스캔본에 쓰여 있던 이름이기도 합니다. 처음 “가기 전에 쓰는 시들”이라 썼다가, ‘시’에 작대기를 찍 긋고 ‘글’이라는 고침. 시와 글이 얼마나 다른지 응당 알았던 사람.

  그래서 표지의 제목을 그리 따랐습니다. ‘시’를 가로질러 ‘글’이라는 보탬. 표지를 열어 첫 장, 제일 먼저 만나는 약표제면에는 허수경 시인의 친필 그대로를 실었고요.

  시인이 다람쥐를 보았을 바로 그 집 마당에 내가 섰습니다. 누가 시켜서 챙겨간 것도 아닌데 보라색 코트에 보라색 니트에 보라색 가방을 메고 있던 나였습니다. 누가 시켜서 심은 것도 아닐 텐데 시인의 집 마당에 보랏빛 잔대꽃이 잔뜩 피어 있었습니다. 주저앉아 보이는 족족 따서 앙증맞은 보랏빛 작은 잔대꽃을 한 움큼 손에 쥐었습니다. 시인이 가꾸던 마당에 핀 꽃이라지만 이제 더는 시인이 딸 수 없는 꽃이라는 거, 죽음이란 아는데 참 그렇게 할 수 없는 거…… 그 작은 보랏빛 잔대꽃 한 움큼을 시인의 사진이 놓여 있던 테이블 위에 놓아주었습니다. “수경은 바이올렛이야.” 그때 시인의 부군이 말했습니다. 어제보다 물기가 한층 더 빠진 투명한 하늘색 눈동자를 껌뻑이며 르네 선생이 말했습니다.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수경은 보라였구나. 수경은 보라구나. 넘겨받은 시인의 유고 원고를 가방에 넣어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트렁크 안에서 보라색 보자기를 꺼내 탈탈 털고는 침대 위에 펼쳤습니다. 한국을 떠나올 때 트렁크 지퍼를 다 채우기 전에 후다닥 부엌 선반으로 뛰어가 여러 보자기들 가운데 유독 짙은 보랏빛 보자기 하나 부리나케 챙겨 넣었을 때 설명할 길 없는 나의 그 행동거지에 더는 왜라는 물음을 갖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수경은 보라였으니까요. 수경의 보라였으니까요.

─『가기 전에 쓰는 글들』 편집자의 책소개 중에서

  그 바탕이 보라가 된 사연이라면 사연, 김민정 시인의 메모로 대신해보아요. 책의 만듦에 모든 과정이 ‘선택’이기만 할까요. 응당이라서 응당, 사연보다는 ‘기억’이라 말하고 싶어지는 거지요.

  『가기 전에 쓰는 글들』에는 주황색 엽서가 한 장 실려 있어요. 물론 시인의 친필을 담았음에, 이 귤빛, 또하나의 기억이기도 합니다. 겨우내 창틀에서, 세상의, 한 생애의 모든 기억을 향기로 품고서 그 자리에 있었던 귤 한 알. 가도 아주 가지는 않았을 한 시인의, 어떤 글들의 기억입니다.

  창으로 바깥을 바라보니 삼월의 눈이 내리고 있었다. 베란다 창틀에 작은 귤이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병원으로 가기 전 무슨 생각인지 귤 한 개를 베란다 창틀 위에 올려둔 모양이었다. 언 귤을 먹으리라는 마음이었을까? 나는 창문을 열고 귤을 손으로 집어들었다. 귤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귤 향이 은은하게 나고 있었다. 얼지도 않았는지 귤은 상하지 않고 여전히 싱싱했다.

  나는 귤을 쪼갰다.

  귤 향!

  세계의 모든 향기를 이 작은 몸안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오면서 맡았던 모든 향기가 밀려왔다.

  아름다운, 따뜻한, 비린, 차가운, 쓴, 찬, 그리고,

  그리고, 그 모든 향기.

  아,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가기 전에 나는

  써야 하는 시들이 몇 편 있었던 것이다.

  민정이 보내준 난다 노트 한 권을 꺼내들고

  나는 쓰기 시작했다.

  몇 편의 시가 나에게 남아 있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가기 전에 쓸 시가 있다면 쓸 수 있을 것이다.

  내일, 내일 가더라도.

  그리고 가야겠다. 나에게 그 많은 것을 준 세계로.

  그리고, 그리고, 당신들에게로.

─허수경, 『가기 전에 쓰는 글들』, 307~308쪽.

🚪닫는 문

가을 우체국 앞에서

  가을 하면 떠오르는 것들, 낙엽, 시, 바람, 편지… 잠시 머무는 것, 그래서 더 오래 붙잡아두고픈 것들의 이름 아니려나요. 빨간 우체통에 띄워보내던 엽서 한 통, 시집 사이 책갈피 대신 끼워둔 단풍잎 한 장.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은 빨강, 우리의 말들.

  그런 낭만도 이제는 추억 속으로 바래간다지만, 그때 책장 사이 끼워둔 기억 어디 가지 않았으니 여전히 ‘추억’이라 부르는 것이겠지요. 오늘 한로의 소문, 가을날 엽서 한 장처럼, 시집 사이 머물다 문득 마주한 갈피의 반가움처럼, 그렇게 어느 날 또 만나지기를요.

상강霜降에 돌아올게요. 또 만나요! 🤗

─허수경,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12~13쪽.

• 레고 작가 콜린진의 첫 개인전 <콜린진의 역사적인 레고 Colin Jin's HEstorical Lego>가 10월 11일(수)부터 열려요. 레고로 못 만드는 것이 없는(!) 콜린진 작가님의 아주 특별한 레고 아트피스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난다에서는 이번 전시를 위해 『아빠가 만들어준 레고』라는 아트북을 만들었답니다. 전시장에서 단독 판매되며, 구매시 아트 엽서(5장 1세트)를 함께 드립니다. 아트북도 엽서도 모두 소량 수작업 제작이니, 걸음하신 분들 꼭 들여봐주셔요! 👉🏻 전시 소식 바로가기
  
    <콜린진의 역사적인 레고>

    모리함 전시관 2, 3층
    10월 11일~25일, 11시~18시
    *전시 중 무휴, 입장 무료

  
  
• 2023 <파주북소리> 행사가 10월 27일부터 개최됩니다. 유진목 시인과 난다가 '오픈하우스' 프로그램으로 참여해요. 곧 자세한 소식과 참여 방법 전할게요! 👉🏻 파주북소리 인스타그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