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오는 소문

남아 있는 계절을 간직하듯이

🔎책이라는 만듦새, 우리의 만짐새

난다는 책을 뜯어…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의 표지에는 김은적 작가의 작품 <손을 씻어요>가 담겼습니다. 한지에 먹을 올린 드로잉인데요, 먹이라니, 무채의 스펙트럼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소재일 테지요. 두 손에 내리는 첫눈 같은, 마음 같은 온기 또한 책과 이렇게 맞춤할 수 없으니,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버린 작품이기도 하고요.

  한지는 아니지만 특유의 질감과 따뜻함을 살려보려, 표지 종이는 매그칼라의 미스트 색상을 골라보았어요. ‘미스트’는 안개라지만, 어쩐지 소리 없이 기척 없이 다녀가는 첫눈의 느낌과도 닿아 있는 듯합니다. 우리가 흔히 무채색이라 부르는 그 넓은 스펙트럼 안에도 따뜻함과 차가움, 수많은 결들이 있음을 생각게 하는 묘한 빛이기도 하고요. 이 책의 표지에도 코팅을 하지 않았는데요, 사각이는 소리에 시인이 꼭 쥐었을 승복의 소맷자락 떠올랐으면 하고요. 책도 첫눈을 맞는다면, 눈송이 점점으로 스며 천천히 품어낼 그 장면 떠오르기도 했고요.

  마음의 벼랑에 고드름이 슬고 무릎이 시린 어느 시간에도, 아니 어쩌면 그런 때야말로, 우리 스스로가 온기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지요. 그렇게 겨울의 온기를 알게 하는 책,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입니다.

  사랑은 화려한 광휘가 아니라 일상의 빼곡한 쌀알 위에 있다. 늘어난 속옷처럼 얼핏 보면 남루하지만 다시 보면 우아한 우리의 부피. 매일 산책하는 강변의 기나긴 길과 일렁대는 강물과 버드나무 줄기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그런 아름다운 걸 ‘무채’라고 퉁쳐서 불러보았다. 배앓이를 하듯 자꾸 보고 싶을 때 무채 무채 말하다보면 좀 나아졌다. 죽은 개들이, 인자했던 할머니 손끝이, 그렇게 건너온 저쪽, 너머의 존재와 말들이, 너무 귀하게 느껴져서 쥐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언젠가는 이 사랑도 비울 것이다. 그때까진 용감하게 사랑을 줘야지. 그럼 지금부터 이야기를 해볼까. 색을 열고 색을 삼키고 색을 쥔 채로 나를 키운 사람들의 마음 이야기.

─고명재,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14~15쪽.

🎙 5분 만에 5문 5답

고명재 시인과 함께, 우문즉답

고명재 시인(고) 그리고 김동휘 편집자(휘)

우문 ①

휘:  올해 첫눈, 보셨을까요? 아주 특별한 분과 첫눈 맞으셨다고 들었어요.

고:  네, 맞아요! 제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서울에서 민정 누나(김민정 시인)를 만났어요. 근황 얘기도 하고 하다가… 누나가 갑자기 뒤를 쳐다보더니 “어머, 눈 온다!” 하는 거예요. 정말로 환상적인, 환상처럼 첫눈이 왔어요.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더니 어쩜 너랑 이렇게 눈을 보냐” 했죠. 그 책 쓴 사람과 책 만든 사람이 함께 보는 첫눈, 잊지 못할 겨울이네요. 첫눈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보기,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제가 너무 보고파 했더니 정말로…

휘:  앗, 그렇게 보고팠던 사람이 바로? (고: 김민정!)

우문 ②

휘:  근황 겸, 어떤 마음으로 이 계절 보내고 있으실까요?

고:  제가 시집(『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준비하고 있을 때, 문학동네 강윤정 편집자님께 편지를 썼던 적이 있어요. SNS에서 그런 글을 봤는데, 아메리칸 인디언 중에 아라파호Arapaho족은 11월을 이렇게 얘기한대요. “모든 것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보통 이 시기엔 “벌써 연말이야?” 이런 게 오잖아요.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직후부터는 아, 다 사라진 건 아니야, 여전히 남은 게 있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마침 그때가 11월이어서, 편집자님에게 그 내용을 편지에 담아 보내드렸던 적이 있어요.

휘: 세상에, 저한테도 그런 편지 받고 싶어요!(농담입니다…) 이런 멋진 생각을 365일 하시는 건가요?! (고: 제가 아니라 그런 글이 올라오는 SNS가 멋있는 것 같아요…)

우문 ③

휘:  SNS 하니까, 이런 밈이 있잖아요. “나락도 락이다.” 그런 의미에서 계절도 절이다, 추천할 만한 절이 있을까요?

고:  여행 자체를 사찰 위주로 다녀본 적이 있어요. 종교적인 것과 무관하게, 사찰을 다녀오면 모든 게 해방되는 느낌이 들잖아요. 전라도 지역에 좋은 사찰들이 정말 많아요. (하나를 꼽는다면) 선암사! 너무 아플 때 갔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는데, 시인으로 데뷔가 계속 안 된 지 7~8년 쯤 되었을 때, 몸도 정말 아픈데 아픈 줄도 모르던 시기였거든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서 불상 보고 풍경風磬 흔들리는 것 보고… 그것만 보다 왔는데 뭔가 달라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달라진다고 하면 흔히 이전과 ‘혁명적으로’ 달라지는 변화를 생각하잖아요.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그냥 이렇게 있어도 되는구나”를 받아들이게 되는 변화? 절에 가는 걸 그래서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제 트위터 ID가 원래 ‘계절’이었답니다…

휘:  그렇다면 계절도 절이다, 그리고 계절은 고명재다.

우문 ④

휘:  여전히 ‘잘’ 먹고 다니시는지 궁금하기도 해요. 고명재 시인이 추천하는 겨울 음식이 있다면?

고:  두 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곶감입니다. 말린 과일이 달아진다는 거 엄청 시적이지 않나요? 곶감이 왜 겨울에 맛있지 생각해봤는데, 말린 과일이라는 게, 걔들이 볕을 많이 쬐어줬잖아요, 저희 대신에… 그래서 곶감을 먹으면 볕을 흡수하는 느낌이 들어요. 이 단맛은 빛의 맛이다, 이런 생각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또하나는 제철 음식은 아닌데, 역시 겨울엔 풀빵, 국화빵이죠. 붕어빵은 그 형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노력과 품이 들어간 것 같고요, 땅콩빵은 형태가 너무 작고 고소함에만 치중된 것 같아요. 그런데 국화빵은 입에 넣어보면 정말로 꽃잎처럼 ‘풀어지는’ 맛이잖아요. 이게 되게 시적인 빵이다, 그런 생각을 자주 하고요. 그리고 진짜 보고 싶은 사람, 먼저 떠난 사람들 생각날 때 저는 국화꽃은 못 사니까 국화빵을 먹어요. 제 나름의 의식? 보고 싶다 하면 국화빵을 괜히 찾게 되는…

휘:  정말로 속까지 따뜻해지는 의식인데요? 요즘 풀빵 파는 곳이 많이 줄었는데 국화빵 살리기 캠페인이라도 해봐야겠어요. (고: 사람들이 설득됐으면 좋겠다…)

우문 ⑤

휘:  마지막 질문입니다. 다가올 2024년이라든지, 고명재 시인이 요즘 기다리는 것이 있다면?

고:  저는… 진짜 없는 것 같은데! 크게 바라는 것이 없어요, 정말. (휘: 생불의 마음?!) 앗 절대 그런 건 아니고… 저는 정말 시 쓰고 책 읽는 걸 하고 싶었고, 지금 그것들을 하면서 살 수 있어서 행복하거든요. 딱히 지금은 바라는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제철 음식 제때 잘 나오면 좋겠다?

휘:  그거야말로 시인데요? 무엇이든 ‘제때’가 있으니, 보고픈 것들 다 제때 왔으면 좋겠다.

🚪닫는 문

가장 따뜻한 계절, 겨울

  겨울 하면 꼭 차갑고 날선 것들만 떠오르지는 않는 것 같아요. 화목 난로 앞에 쬐는 손, 김이 모락 나는 군고구마, 따끈한 무릎담요 위에 쌓이는 귤껍질들, 노점마다 다닥다닥 붙어앉은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종이컵 속 어묵 국물… 어쩌면 가장 따뜻한 계절은 겨울. 온기는 사람으로 사랑으로 살 비벼 피워내는 것일 테지요.

대설大雪에 돌아올게요. 또 만나요! 🤗

  하고 싶은 일들을 써본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것들을 오래도록 함께 좋아하기 위해서.

─고명재,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35~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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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희연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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