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까글거리는 것 없이 나지막한 단어를 발음해봅니다. 오늘은 눈이 조금 온다는 소설小雪이지만 이 절기를 마주하면 어쩔 수 없이 소설小說이 떠오릅니다. 그런 연상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 『설국』(가와바타 야스나리)으로도 이어지고 거기에는 자연스레 몇 가지 일본 소설들이 따라옵니다. 고요해서 더 처연한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그 후』, 아름다움을 좇는다면 빠질 수 없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들, 특정 시기를 거치며 누구든 한 번쯤은 읽어봤을 『인간 실격』 같은 다자이 오사무의 파멸적인 소설들……

  모두 역사나 거대 담론에서는 비껴간 듯한, 섬세하고 우아한 소설입니다. 그런데 사실 소설小說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역사와 사회를 움직이는 거대한 흐름에 대한 것이 아닌 그 흐름 안에 존재하는 대단찮은 존재에 대한 이야기.

  굳이 눈이 오는 계절을 두 번으로 나누고 그중 하나를 '소설'이라 이름 붙인 데에도 비슷한 이유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오는 눈의 정도로 경중을 따지고 차등을 두려는 것이 아닌 그 대단찮게 올 눈을 찬찬히 바라보는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아직 떨어지는 잎, 곧 자그맣게 올 눈을 바라보는 계절입니다. 

  난다는 작년부터 오 년간 이어질 시리즈 하나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날짜 없는 일기' 시리즈로, 날짜가 부재하는 이수명 시인의 일기를 일 년 단위로 묶어 매년 한 권씩, 총 다섯 권의 책을 발간할 예정입니다. 작년에는 『내가 없는 쓰기』가 첫 권으로, 올해에는 그 두번째로 『정적과 소음』이 나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오랫동안 '일기'라는 장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는데요. '일기'라는 글의 형태가 간직하고 있는 어떤 꾸밈없음, 또 극히 사소한 것만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 부질없음,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글에 서려 있는 굉장히 생생한 감각, 이런 것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수명 시인도 이 글에 대해 "문학화시킬 필요가 없는 평평한 순간들에 대한 기록" "문학적 액션을 가미하고 싶지 않은 순간을 유지하려는 시도"라고 이야기합니다.

  '날짜 없는 일기'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사적인 기록이지만 날짜가 부재하는, 혹은 의도적으로 날짜를 지운 기록. 날짜가 없다는 것은 기록이 정박할 시공간을 잃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것이 2024년 모월 모일에 대한 기록이었다는 사실은 날짜의 부재와 함께 영영 알 도리가 없어졌다는 뜻이겠습니다. 한 개인의 역사에 사적史跡으로서의 가치를 조금은 잃었다는 뜻이기도 하겠습니다.

—사이토 마리코, 「눈보라」 부분, 『단 하나의 눈송이』, 봄날의책, 2018.

  ‘작은 눈’이라고 할 때 떠오르는 한 장면, 이 시 속 “단 하나의 눈송이”였답니다. 일본 시인 사이토 마리코의 시집인데, 어쩐지 이 책에는 역자가 따로 없지요. 일본인인 그가 직접 한국어로 쓴 시집이기 때문이에요. 90년대 초 한국으로 유학을 온 그는 시를 쓰기로 마음먹습니다. 처음에는 먼저 일본어로 쓰고서 한국어로 고쳤다고 해요. 그리고 곧 깨닫게 되지요. 이것이 한국어로 된 ‘시’라면, 처음부터 한국어로 생각하고 한국어로 쓰는 것이 맞는다는 사실을요.

 

  소개한 시 「눈보라」는 순전히 ‘눈송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어 탄생한 시라고 하는데요. 일본어에는 눈송이에 완전히 대응하는 고유어가 없다는 거지요. 한국어로 눈송이를 발음할 때의 그 느낌, 집합체로서의 눈이 아닌 눈송이 하나하나의 존재감 같은 모든 것이 그의 마음에 꼭 들었다 하고요. 그밖에도 ‘꽃’ ‘나무’… 범상한 우리말들이 사이토 마리코의 입안에서 곰곰 머물다, 생경하여 생생한 활기를 얻으며 시로 태어납니다.

 

  이렇게 모인 시들은 1993년 『입국』이라는 제목으로 묶였다 머잖아 절판되었는데요. 2018년 봄날의책에서 이 『입국』에 몇 편의 시를 더해 『단 하나의 눈송이』를 다시 펴냅니다. 이문재 시인의 참으로 감탄스러운 추천사가 함께 있어요. “사이토 마리코의 시집은 한국문학이 외국인에게 처음으로 발급한 ‘비자’다.”

  이 문장이 울린 마음도 여럿이어서요, 은희경 소설가가 바로 이 대목을 따 소설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문학동네, 2014)의 제목으로 삼았답니다. 책에 실린 여섯 편의 소설에는 유사한 인물들과 동일한 공간이 거듭 등장하고, 이야기는 언뜻 하나처럼 보이는 모티프로 교차합니다. 그 유사성 위에서 인물들 저마다의 ‘홀로’가 한 겹 한 겹 숨어 있던 구체성을 드러내고요. 그러니까 “다른 모든 눈송이”가 제아무리 비슷해 보일지라도, 결국 저마다 “단 하나의 눈송이”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난다에서 펴낸 『또 못 버린 물건들』도 그러한 이야기였구나 합니다. 어쩌면 공산품의 하나일 이 물건, 기어이 버릴 수 없는 것은 내 손을 타고 이야기를 입으며 ‘단 하나의 물건’이 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이토록 고가의 물건이니 필히 만년필이리라 철석같이 믿고 산 선물이 ‘고급’ 형광펜임을 알았을 때 밀려드는 것 분명 허탈함이지만, 거기서 어떤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기도 하지요. 사연 없는 물건이 어디 있겠나 할 적에, 어떤 물건은 그 사연을 입어 비로소 나에게 ‘단 하나’가 되는 법이니까요.

   문득 ‘사연팔이’라는 말이 어쩌다 이리 부정적으로 쓰이게 되었나 합니다. 어떤 일과 그 연유를 뜻하는 사연. 누구에게나 미처, 끝내, ‘또!’ 버리지 못하는 이유들 있으니, 그 모두 ‘사연’ 아니려나요. 버릴 수 없으니 팔기라도 해보는 거지요. 사연의 값은 모름지기 또다른 사연으로 치름이 어떤가 싶고요.

 

  아닌 게 아니라 에세이를 엮으며 하는 생각들입니다. 어쩌면 이 모두 사연을 팔고 또 사는 일. 오늘의 책상 위를, 근래 지나온 길들을 둘러봅니다. 그 어디에나 사연 있고요, 무엇을 집어도 ‘단 하나’일 이야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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