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이구나, 하고 보니 입동立冬입니다. 늦은 가을 혹은 겨울의 초입. 아무려나 낙엽 지는 계절이지요. 그간 실내에서 관엽식물 화분만 몇 키워왔는데, 올해는 차양 없는 베란다에 무화과나무 세 그루를 심었습니다. 계절을 달리 타지 않는 열대 식물들과는 달리 온대의 유실수는 이제 바람이 제법 차구나 하고 돌아볼 때면 이미 노랗게 잎들 떨구고 있습니다.

  창틈으로 살갗으로 마음 틈바구니로 찬바람 스미는 이맘때 종종 시를 생각하게 되지요. 이 계절엔 왜 시일까, 그렇게 물을 적에 떨어지는 낙엽 한 장 있고요. 그 떨어짐의 천천함을 ‘물끄러미’ 보고 있습니다. 가지에서 말라가는 잎도 아니고 바닥에 떨어진 잎도 아니고, 떨어지는 그 순간의 잎을 봄이 진짜 낙엽落葉과 만나는 일이구나 합니다.

  보지 못하던 것을 보는 일, 못 닿은 것에 닿는 일. 그것이 곧 ‘물끄러미’라 함에, 시인의 눈과 시의 일 또한 다르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이 계절이면 시가 오는가 합니다. 바람 불면 낙엽처럼 오는가 합니다.

  이 모두 시의적절의 열한번째, 이원 시인의 『물끄러미』를 두고 하는 생각이지요. ‘물끄러미’는 시인이 고 황현산 평론가를 떠올릴 적에 가장 먼저 오는 말이기도 합니다. 걸을 때도 물끄러미, 들을 때도 물끄러미, 나의 생각을 말할 때도 물끄러미였던 사람. 저는 생전에 뵌 적 없는 그이지만, ‘물끄러미’ 걷고 듣고 말하는 누군가를 떠올리자면 다 알 것도 같습니다. 그리 배워서 그렇게 따라야 할 것도 같습니다.

  거진 갑진년 한 해가 마무리되어가는 무렵, 시의적절을 엮어내는 열두 달도 한 칸이 채 안 남았구나 합니다. 어떤 이에게 추천하면 좋을까, 어떤 곳에 어떤 손에 쥐여지면 좋을까 고민할 적에 꼭 ‘선물’이었으면 좋겠다 했던 시리즈지요. 생일을 맞아 친구에게, 생일을 맞은 나에게 준다면 딱이기야 할 테니까요. 사담이지만 11월 달력에 생일이 있는 저여서, 시의적절로 ‘셀프’ 선물 삼으면 좋겠다 했던 바람을 제 몫으로도 이룬 달이 되었습니다.

  어느 달이든 선물로 모자랄 일 없을 시의적절이지만, 『물끄러미』는 유독 선물 같구나 합니다. 연말을 앞두고 하나둘 선물을 모으기 시작할 때이기도 하지만, 그 선물하기의 달인이라 할 이가 이원 시인이기도 한 까닭에요. 귀엽다고, 예쁘다고,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산 것들은 오히려 곁에 없다는 사람. 그런 것일수록 선물로 보내야 한다고 믿는 사람. 무척이나 내 곁에 두고 싶었던 것들을 보냈으니, 더더욱 받은 이의 얼굴을 잊지 못하리라는 사람.

  선물은 그렇게 하는 것이구나, 또 한번 배웁니다. 그간 저는 선물이란 ‘주고서 잊어버려야 하는 것’인 줄만 알았지요. 하지만 진짜 선물은 줌으로써 잊지 않겠다는 것, 당신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 그러니까 가장 귀하고 값진 것을 선물로 건네야 하는 이유입니다.

  『물끄러미』에는 주기도 받기도 한 여러 선물이 나오지만요, 역시 이 계절엔 시인이 ‘부러’ 사러 나가는 목도리와 털장갑과 겨울 양말이 딱이지요. 문득 언젠가 선물가게 주인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포근함과 다정함, 흘리지 않고 잘 담아 색지에 상자에 잘 매듭하는 일을 그려봅니다. 꼭 나중의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이라도, 책을 만드는 오늘의 일이 꼭 그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11월에는」, 『물끄러미』 

  본격적으로 밤이 길어지는 11월에는 덩달아 잠자리도 길어집니다. 아니, 잠에 드는 자리가 길어지는 것일 테지요. ‘아침이면 사라질 밤 동안의 공상’은 유독 깊어만 갑니다. 그럴 때면 함께해주는 읽을, 볼, 들을 거리가 되어준 친구들이 있습니다. 최근 매일 다짐하는 새벽운동을 매일 밤이면 포기하게 만든 밤의 친구들을 소개합니다.

  잠과 여행은 ‘지금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점에서 많이 닮았습니다. 실제로 여행만 가면 평소보다 잠이 잘 드니 이거, 궁합이 맞는 조합이긴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방의 모든 불을 끄고 티비로 보는 여행 콘텐츠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습니다.

  요즘이야 여행 유튜브가 넘쳐나지만 예전에는 세계테마기행이 있었죠. 지금도 세계테마기행은 든든한 국밥 같은 고전. 가끔 고전이 땡길 때면 저는 세계테마기행을 봅니다.

  원래부터 여행지라면 자연에 가까운 오지나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 있는 곳을 선호하는데, 이런 저의 취향을 정확히 알고는 오늘 아침 유튜브가 세계테마기행의 무스탕 편을 추천해줬습니다. ‘무스탕’이라고 하면 양털로 만든 재킷을 뜻하는 줄만 알았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의 지명인 줄은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바로 나중에 볼 동영상으로 저장해놨고요, 그 ‘나중’은 아마 오늘밤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뮤지션을 좋아하냐고 했을 때 곧바로 ‘이승열’이라는 이름을 고민 없이 꺼내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여전히 좋아하는 뮤지션이지만, 그때 그 시절을 따라갈 순 없겠지요.

  이승열은 1994년 방준석과 함께 유앤미블루라는 밴드를 결성하며 음악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밴드는 2집 앨범을 내고 1997년 해체했습니다. 이승열과 방준석은 각각 솔로로, 영화음악감독으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방준석은 이후 요즘 배우로도 잘 알려진 백현진과 ‘방백’이라는 이름의 듀오로도 활동했습니다. 고백컨대 방백의 음악도 참 많이 들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방준석은 2022년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숨을 거뒀습니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2007년 라디오 영상에서 이들은 유앤미블루 해체 십 년 후 다시 모여 밴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십 년 가까이 된 영상 속 두 사람이 그 시점을 기준으로 십 년도 더 된 과거를 이야기합니다. 게다가 그중에 한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없습니다. 또한 이들의 음악을 들을 때면 저는 이들의 음악을 듣던 과거 여러 시점의 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디오 영상을 튼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주 기묘하고도 강렬한 향수에 빠졌습니다. 이틀 밤에 걸쳐 들었던 오래된 라디오였습니다.

  사실 잠 못 드는 밤, 최고의 친구는 텍스트입니다. 그중에서도 너무 많은 두뇌 활동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잠이라는 먼 여행을 떠나기 적절한 태세를 갖추는 데에는 시만한 것도 없겠습니다.

  시집은 무조건 그때 그 순간에 ‘땡기는 것’을 읽는 편입니다. 사놓고 아직 안 읽은 시집일 수도 있고 이미 여러 번 읽은 시집일 수도 있겠습니다. 요 며칠은 잠들기 전 위선환 시인의 시를 읽었습니다. 1960년에 등단했다가 1970년 이후 돌연 절필, 이후 30년이 지나 다시 시를 써왔다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시인은 아주 고전적인 정서를 대단히 현대적인 작법으로 풀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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