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옵니다. 올 한 해의 모든 밤을 기억하고 있는 밤이 옵니다. 오늘은 지난 365일 중 가장 밤이 길다는 동지冬至입니다.

  깔끔하게 한 해의 마지막날인 12월 31일이 동지였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봤지만 이런 엇나감이 오히려 좋습니다. 밤에는 낮을 생각하기 마련이고, 낮에는 밤을 생각하기 마련이겠죠. 동지는 단순히 밤이 긴 날이 아닐 겁니다. 환하게 밝히던 불은 꺼지고 고백도 부름도 잦아들었고, 모든 초록이 지고 모든 태양빛도 꺼져든 겨울밤, 어두운 밤, 모든 것이 까마득한 밤, 그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밤, 떠올리는 밤, 가장 두터운 과거 그 자체인 밤.

  이런 밤이면 뭐든 해도 좋겠습니다. 먼지 쌓여가는 책을 다시 한번 펴보는 것도 좋겠죠. 스피커로 이런저런 노래를 듣는 것도 좋겠습니다. 다만 모쪼록 혼자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 홀로 또 같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의 소문난다가 2024 갑진년의 스물네번째, 마지막 호네요. 동지와 하지는 모두 한자로 이를 지至를 쓰건대, 차례차례 계절들 지나 어느 끝을 향해 달려왔음을 이르나보다 합니다. 끝이라는 말보다 마침내 닿았다고, 도착했다고, 이르렀다고 말해보면 한결 뿌듯도 하겠습니다.

 

  웩슬러Wechsler 검사라는 것이 있지요. 흔히 IQ 검사라 불리는 바로 그것입니다. 유형에 따라 항목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언어 이해도 검사는 반드시 포함되고, 그중 ‘공통성’을 추론하는 문항들이 있어요. 가령 ‘빨강’과 ‘파랑’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물으면 색을 나타내는 말, 이렇게 답해볼 수 있겠지요. 비교적 답하기 쉬운 문항도 있지만 검사를 진행하다보면 점차 난도가 높아지는데요, 이런 문항을 만난 기억이 남아 있어요. ‘시작’ 그리고 ‘끝’.

 

  기본적으로 임상심리사와 대면하여 진행하는 정성qualitative 검사이기 때문에 단수의 정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 돌이켜봐도 무엇이 충분한 대답이었을까 고민하게 됩니다. 어렵게 표현해 “시계열상 양극단”, 이렇게 답해볼 수 있으려나요. 하지만 슬금슬금 어깃장 본능이 올라오는 거지요. 비가역적, 단방향의 시간성을 전제하다니 지나치게 서구적인 관념 아니냐! 하고요. 순환하는 것, 돌고 도는 것, 동양적 시간관념이 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아주 좋은 예시로 절기가 있지 않겠어요.

 

  어쩌다보니 선문답이 되었지만 시의적절 12월의 제목이 참으로 적절하다, 그런 생각이었답니다. 2024년 시의적절의 마지막, 김복희 시인의 『오늘부터 일일』임에요.

  시인은 언제나 ‘일단 시작’하는 마음입니다. 끝내지 않는다기보다, 끊이지 않는다기보다, ‘끊임없이 시작’하는 자세가 있습니다. “하찮아 보이지만 위대한 스쿼트 한 개”로 오늘의 운동을 시작해봅시다. 농구 선수만 농구를 하나, 슛 대신 패스부터 시작해봅시다. 남들이 어디로 가든 어떤 걸음으로 가든 나만의 속도로 춤을 추며 가봅시다. ‘원데이 클래스’ 정도면 가볍고 딱 좋지요. 그렇게 매일매일이 시작이니 오늘부터 다시 “일일”입니다.

 

  시와 무관한 이야기일 리 물론 없고요, 시인에게 시 또한, 시야말로, 백지 앞에서 처음의 마음으로 쓰는 일일 테지요. 아하, 이제 누군가 시작始作과 시작詩作의 공통점을 묻는다면 쉬이 답해볼 수 있겠습니다. 사랑을 시작할 때 누구나 시인이 된다면, 시를 쓸 때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셈이니까요.

  이렇게 시의적절도 열두 시인의 열두 달 릴레이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여기에 발맞추어 시의적절 열두 권의 표지로 함께한 김수강 사진작가의 작품집 『그것다운』도 펴낼 수 있었고요. 여러모로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자리 되었네요.  그리고 또 물론, 끝자리에 시작을 놓아보자는 오늘이니 내년에도 시의적절은 계속됩니다, 요 말도 응당 따라와야겠지요.

(섭섭하기 전에 스포일러 필수이니… 정끝별 시인과 『시쓰기 딱 좋은 날』, 이렇게 두 이름 먼저 흘려보아요…!)

  겨울冬에 이른至 오늘, 동지의 영어 표현인 Solstice의 어원은 태양sol과 멈춤stit-입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천구상 태양의 움직임을 그려보면 남중고도가 쭉 낮아지다 오늘 동지에 이르러 다시 상승하기 시작하는데요, 방향이 바뀌는 셈이라 동지 하루 동안 마치 태양의 움직임이 멈춘 것처럼 보인다지요.

 

  긴 밤 지나면 다시, 해는 더 높이 뜨고 하루하루 길어질 낮이 찾아옵니다. 멈춘 듯 보여도 그침일 리 없지요. 이번 겨울, 작은 불빛들 하나씩 모아 낮보다 환히 밝힌 우리니까요.

—장 주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열화당, 2019.

  최근 종종 가는 가게의 사장님과 우연히 책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프랑스 작가 장 주네의 소설을 막 읽으셨는데 조금 어려웠다고 하시길래 장 주네가 자코메티의 조각과 그림에 대해 쓴 에세이를 추천해드렸습니다. 자코메티를 좋아하신다고 하셨으니 분명 좋아하실 거라 양념을 열심히 쳤고요.

  이후로 소식을 몰라 읽으셨는진 모르겠지만 추천을 하고 나니 도리어 제가 다시 읽고 싶어져서 후루룩 단숨에 다시 읽었습니다. 글 초반에 장 주네는 아름다움이 "마음의 상처"로부터, "뿌리 깊은 고독"으로부터, "서로 교류할 수 없고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개별성"으로부터 온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연스레 떠오른 책이 하나 있었습니다. 올해 초에 읽은 『피아노로 돌아가다』입니다.

  어렸을 때 피아노를 전문적으로 배웠던 저자는 연주를 그만두고 예술 평론가가 됩니다. 시간이 지나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이 경험은 그에게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어머니의 죽음, 스스로의 삶, 이 모두를 다시 움켜잡기 위해 그는 어린 시절 배웠던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다시 연습하기 시작합니다.

  위에 인용한 부분은 저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대한, 아니 예술 전반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예술의 가장 심오한 경험은 "다른 존재에게 절대로 넘겨주거나 전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암시를 흘끗 보는 것"이라니, 그 자체로 참 아름다운 정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가끔 왜 소설을, 시를 읽는가 하는 질문을 받습니다. 누가 묻지 않으면 스스로 묻기도 하고요. 사실 소설이나 시가 더 특별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 음악을 듣냐, 영화를 보냐, 연극을 보냐는 질문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장 주네와 필립 케니콧의 저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저는 언젠가 '흘끗' 본 적 있는 아름다움의 암시를 다시 보기 위해서, 계속 보기 위해서 읽는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해의 암시가 모두 쌓인 오늘 동지 밤, 산란하는 그 빛을 이 까마득한 밤에 다시 그러모아봐도 좋겠습니다.

• 12/23 오은×유희경 시의적절 북토크 👉🏻@의정부 책방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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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9 김복희 <망년과 송년 사이> 👉🏻@대전 버찌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