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1월이고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는 말을 떠올려봅니다. 당나라 때 선승들의 어록을 모은 『벽암록』에 등장하는 화두인데요, 운문선사가 설법을 하며 이렇게 묻지요. “지나간 보름간의 일은 묻지 않겠으니, 앞으로 맞을 보름 이후에 대해 한마디 일러보라.” 어쩐지 선뜻 대답하는 이가 없지요. 이내 선승이 자답합니다. “날마다 좋은 날 아니겠는가!”

  매일이 좋은 날이라, 그 좋은 뜻만으로도 새해에 딱 맞는 축원이지만, 이 문답의 배경을 알고 보면 신년 인사로 더욱 맞춤한 말 같습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지난날은 너머에 묻고서 더 묻지 않기로. 새 마음 새 뜻으로 맞는 새날, 훌훌 털어 만나는 시작일 때 더없이 좋을 오늘입니다.

  영어 공부하기, 제2외국어 배우기… 어쩐지 매번 새해 목표 리스트에 단골로 오르는 내용이긴 한데요(…번번이 다음해로 미뤄져왔다는 뜻…), 올해는 다른 언어 대신 수어手語를 배워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 2016년 2월 3일 제정된 「한국수화언어법」에 따라 대한민국의 수어(한국수화언어)는 국어와 동등한, 명실상부 대한민국 제2의 공용언어라고 해요. 말과 글 다루는 일 하건대 제2국어도 조금은 익혀두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어졌지요.

  기초 중의 기초 수어부터 시작해봅니다. 헬로, 봉쥬르, 니하오… 언어 배우기의 첫걸음은 모름지기 인사말이니까요, 양손 검지를 ‘1’을 나타내듯 세우고 마주해 만납니다. 그리고 두 손을 약간 구부려 양쪽 가슴에 대고 상하로 엇갈리게 움직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국수어사전에 따르면 ‘반갑다’ ‘즐겁다’ ‘재미’는 같은 수형을 씁니다. (수어 단어를 그림과 영상으로 쉽게 배울 수 있는 온라인 한국수어사전이 마련되어 있어요! 👉🏻링크는 여기) 요 수형은 간지럼을 태워 환히 웃는 표정에서 왔다 하고요. 하나와 하나가 만나는 것이 시작, 그렇게 꺄르르 웃는 즐거움이 곧 반가움.

  2025년 1월의 첫 레터네요. 다시 만난 반가움만큼 크게, 환하게, ‘째지게’ 웃어봅니다.

  예고한 대로, 2025년에도 시의적절은 계속됩니다! 다시 시작하는 시의적절의 첫 얼굴은 『시쓰기 딱 좋은 날』 그리고 정끝별 시인이에요. 시인은 오늘 소한과 다가올 대한 사이, 딱 요맘때 요즈음 태어났다고 하니, 이 계절의 주인이자 1월에 ‘딱 좋은’ 시인이라 말해볼 수도 있겠지요.

  새 마음으로 시의적절 시작하며 소소하고도 소중한 새로움들 있었는데요, 그중 하나로 1월 정끝별 시인은 서른한 날 매일에 이름을 붙여주었답니다. 1월 1일은 첫 일기를 쓰는 날, 12일은 바람을 가르는 날, 24일은 동네책방 가는 날… 시인을 따라 오늘의 ‘할일’을 만들어봐도 뿌듯할 테고요, 나대로 나만의 ‘날 이름’을 붙여보는 것도 재미일 테지요. 1월 5일, 일요일, 소한 말고도 오늘을 불러줄 다른 이름이 있다면 근사하지 않으려나요. ‘첫 원두를 볶는 날’ ‘촛불로 소원 비는 날’… 뭐가 좋을까, 여러 이름들 입안에 굴려봅니다.

  상자를 보면 나는 늘 열고 싶고, 닫고 싶습니다. 상자 속 상자가 상자를 빠져나올 때, 상자가 그 무엇을 내뱉고 그 무엇을 담을 때, 한 상자는 또다른 상자를 위해 열리고 또 닫히곤 합니다. 빛과 그늘처럼, 안과 밖처럼요. 세계는 상자에서 상자로의 이사이자 이주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제각각의 상자 안에서 잠시 쉬고, 잠시 울고, 잠시 자는 존재일 뿐. (……)

  상자의 다른 이름인 새해, 새달, 새날, 새 다이어리에 어떤 것들이 채워지고 또 비워질까요? 상자 안의 그늘에 상자 밖의 빛이 자주 들락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상자는 늘 내 곁에 있습니다. 상자 속 빈 공간이 출렁이고 있습니다.

  날의 이름 떠올리며 올해 다가올 ‘달’의 이름들도 한번 따라가볼까요.

2월 임경섭 / 3월 김용택 / 4월 이훤 / 5월 박세미 / 6월 이우성 /
7월 박지일 / 8월 백은선 / 9월 유계영 / 10월 김연덕 / 11월 오병량 /12월 고선경

  이름만으로 벌써 반가운 마음이지요. 지난해에 이어 역시나 계절에 제철에 ‘딱 좋은’ 맞춤이고요.

  2025년 시의적절 시리즈의 표지는 글과 사진을 다루는 장우철 작가와 함께할 예정이에요. 『시쓰기 딱 좋은 날』의 얼굴은, 1월이니까요, 1월 무주 눈밭의 사과로 열어보았습니다. 시간을 멈추는 것이 사진이기도 하겠지만, 찰칵, 그 안에 시간을 고스란히 끌어안는 작업이라 말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정끝별 시인이 시를 쓸 적에 ‘한 소식’을 듣고 ‘그분’이 오시는 시간이라 하면 한밤중인데요, 그런가 하면 한겨울 마당에 어떤 위안으로 내리쬐던 정오의 햇살처럼 시가 오는 일도 있습니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마냥 기다리는 ‘좋은 때’가 아니라 시를 향해 열린 ‘반가운’ 마음, 기꺼이 시의 마당으로 나서는 마중일지도요.

  그렇담 이렇게 말해도 말이 될까요? 일일‘시詩’호일, 날마다 시쓰기 딱 좋은 날! 하고요.

  내게 시를 쓴다는 건, 한겨울 정오 직전의 온도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내가 발을 딛고 있던 곳은 이런저런 까닭에 대체로 한겨울인 채로였으나, 한 편의 시를 떠올리거나 한 편의 시가 쓰일 때마다 겨울 햇살을 받는 듯 온몸이 데워지곤 했다. 그 온도에 대한 기억, 그 온기에 대한 기대가 아니었으면 지금 이곳의 한겨울은 한없이 춥기만 했을 것이다.

  방금 시 한 편이 왔다, 정오를 향해가는 남도의 나른한 한겨울 햇살처럼. 점심은 아직이고 아침밥은 이미일 때, 물 묻은 손을 훔친 엄마가 양푼에 담아 건네주셨던, 김이 모락모락하는 다디단 찐 고구마를 받아든 기분이랄까. 통영이나 여수나 강진 어디쯤, 남녘의 끝 한려수도에서 먹었던 졸복국이나 짱뚱어탕이 먹고 싶어진다.

  나는 벌써, 겨울 햇살을 받고 선 남녘의 한겨울 동백 한 그루가 된다.

  오늘은 늦잠을 잤습니다. 일어나서 시간을 확인해보고 아침 달리기를 하려 서둘러 주스 한잔을 마신 후 운동화를 신고 나가보니 밖은 온통 새하얀 눈. 지난밤에 온 눈은 쌓여 있고 폭설주의보가 내려 있었습니다.

  소한小寒에는 아침이 가장 늦게 찾아온다고 합니다. 도무지 물러나질 않는 밤과 그사이 내리는 눈. 자연스레 이런 문장이 떠오릅니다.

— 필리프 자코테, 『부재하는 형상들이 있는 풍경』

  문장紋章은 보통 어떤 가문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표지를 의미합니다. 겨울 풍경은 그런 점에서 언제나 문장, 모래색과 은색, 녹색, 검은색으로 뒤덮여 흰담비와 흰담비 아닌 것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문장입니다.

  어떤 풍경들을 이야기하는 책, 『부재하는 형상들이 있는 풍경』의 표지는 하얗습니다. 그렇지만 온전히 하얗지는 않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구름인 듯, 눈인 듯 아득하여 달아나는 듯한 형태들이 보입니다. 책의 표지로 쓰인 프리터라는 종이는 오목하고 볼록한 표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두께의 차이에 따라 같은 흰색도 다른 뉘앙스를 가집니다. 표지에 어렴풋이 인쇄된 형태는 그 표면을, 두께 차이에서 비롯되는 미묘한 뉘앙스를 따라 그려진 것입니다. 제목을 따라, 부재하지만 동시에 여기에 존재하는 형상들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이 책을 편집하며 ‘자연’이란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해보았습니다. 자연自然은 무엇보다 ‘저절로 그처럼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나 프랑스어에서도 자연은 nature로,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로는 프랑스어 naître(태어나다)가 있습니다. 두 언어의 상류에 있는 라틴어 natura도 ‘태어나다’는 의미의 nasci의 파생어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은 저절로 태어나는 모든 것입니다. 책 표지에 그려진 형태도 역시 그 바탕에 있는 종이의 굴곡으로부터 ‘저절로’ 태어난 것입니다. 프랑스 선사학자 장 클로트에 따르면 선사인들이 동굴 벽에 그린 벽화도 같은 논리로 ‘태어났다’고 합니다(『선사 예술 이야기』, 열화당, 2022). 어두운 동굴 속 아른거리는 불빛에 비친 동굴의 굴곡진 표면은 선사인의 눈에 다양한 동물 형상으로 보였고 그들은 그저 그들 앞에 ‘나타난’ 그 형상들의 외곽선을 따라 그림을 그린 것뿐입니다. 최초의 예술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그러니 예술도 ‘저절로 태어난 것’입니다. 자연입니다.

  설경을 따라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다보니 떠오르는, 아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중세 소설 『그라알 이야기』(을유문화사, 2009)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이야기는 페르스발이라는 소년이 기사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페르스발은 다른 기사와 혈투를 벌이고 영주를 찾아가고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런데 문득 소설은 페르스발을 멈춰 세우고 그의 시선을 저기 쌓인 눈으로 돌립니다. 거기에는 매에게 공격당한 기러기의 피가 세 방울 떨어져 있습니다. 그 광경을 페르스발은 넋을 잃고 바라봅니다. 거기에서 페르스발은 연인 블랑슈플로르(‘하얀 꽃’이라는 뜻입니다)의 하얗고 발그스름한 얼굴을 떠올립니다. 페르스발은 잠시 자신의 여정을 잊고, 자기 자신마저도 잊고 그 모습을 바라봅니다. 시간이 페르스발을 지나쳐 흐릅니다.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자연의 형상은 그토록 아름다운 것, 걸어가고 있던 길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 목적도 시간도, 자기 자신마저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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