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를 하다가 잊어버린 사람이 문득 떠오르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아직 그 사람이 날 떠나지 않았네, 그 자리가 그래서 눅눅했네. 그래서 햇살 아래 빨래를 말리면서 그 사람 생각이 났구나. 

─허수경, 『가기 전에 쓰는 글들』, 186쪽.

  입추로 들어서 처서도 지났으니 완연한 가을…이어야 했을 텐데, 어제오늘 낮 최고 기온이 30도를 넘어서니 여전히 미진한 여름인 듯도 합니다. 오늘 백로白露는 ‘흰 이슬’을 뜻하는데요, 이맘때면 서늘한 밤 풀잎마다 이슬이 맺힌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지요.

  이슬, 하니 영롱 은은한 반짝임 떠올리게도 되지만요, 급격히 떨어지는 밤~새벽 기온에 포화 수증기량이 낮아지면서 낮 동안 대기 중에 늘어난 수증기가 이슬점에 도달해 응결되는 것이라는, 그러니까 그만큼 일교차가 커졌다는 뜻이므로 감기라든지 계절성 질환에 주의해야겠다는 경고 곁들여둡니다. (네… 제가 혹시 T랍니다…)

  언제 왔는지 투명하게 반짝이다 또 어느새 소리 없이 사라지는 이슬. 그래서 이슬은 무상함, 덧없음의 비유로도 흔히 쓰이지요. 짧은 인생을 아침 이슬에 빗대어 조로인생朝露人生이라 부르기도 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식의 관용구도 있고요. 몽환포영로전夢幻泡影露電, 불교에서 무상無常을 뜻하는 여섯 가지(꿈·환상·물거품·그림자·이슬·번개)에도 이슬이 포함되어 있어요.

  잠시 머물다 가는 것. 짧지만, 짧기에 더 반짝이는 이슬 같은 소문. 그렇게 여러분의 ‘오래된 소문’이 되고 싶은 오늘의 소문난다네요.

👓알아두면 '쓸'거리도 되는 난다 잡학사전

짧지 않아, 가을!

  봄가을이 갈수록 짧아진다는 얘기, 많이들 하지요? 가을의 상징 트렌치코트이건만 옷장에서 꺼낼라치면 다시 쟁여야 한다는 요즘 가을… 그런데 사실 짧아지는 것은 봄가을이 아니라고 해요.

  기상청에서는 가을의 시작을 “일 평균기온이 20℃ 미만으로 내려간 후 다시 올라가지 않는 첫날”이라 정의하는데요(그렇담 아직 가을이 아니었던 것!), 이 기준에 따르자면 73일(1912~1941년 평균)이었던 가을이 69일(1991~2020년 평균)로 소폭 줄어들긴 했답니다. 하지만 기준을 1921~1930년으로 바꿔보면 평균 62일로, 통계를 어찌 해석하느냐에 따라 오히려 요즘 가을의 일수가 늘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결국 오차 범위 안, 가을의 길이 자체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이해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렇담 기후 위기가 다 거짓이란 말인가… 하는 음모론은 물론 아닌 것이, 같은 기간 통계를 비교해보면 여름이 20일 늘어나고 겨울이 22일 줄어들었거든요. 평균 기온이 자꾸만 올라가면서 한반도의 여름은 이제 무려 118일(!)에 이른다는 소문! 여름이 늘어나는 만큼 가을이 늦게 오고 봄이 일찍 끝나면서 우리에겐 부쩍 짧아진 듯 느껴지는 거지요. 진짜 줄어든 것은 바로 겨울!

  노인과 아티스트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재화를 벌기 위해, 회사 등의 시설을 다니기 위해 도심에 있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겠다.
  이곳에 와서 예전에 비해 여행에 대한 욕구가 많이 없어진 것을 인정한다. 왜인가 하고 생각해봤더니 쉽게 자연 속에 놓일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만나러 멀리 차를 타고 기차를 타고 나서지 않아도 된다.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면 된다. 이슬이 내려앉은 초록이, 모든 것이 소독될 것만 같은 노란 햇살이, 색색이 물든 가을빛이, 세상의 모든 것을 덮어주는 하얀 눈이 펼쳐진다. 매번 다른 풍경이 놓여 있다. 질릴 수 없는 풍경이다.

─노석미, 『매우 초록』, 224~225쪽.

  부지런히 계절 소식 전하는 소문난다인지라, 그간 생각지 못했던 계절의 오고감 각별히 또 유심히 살피게 되네요. 여름이 언제 떠나려나, 가을은 언제 오려나 하고요. 영원히 머무는 계절이란 없는 법, 그렇게 떠나고 또 돌아오는 것이 계절일 테지요. 창밖으로 계절의 색들이 무시무종 펼쳐지는 덕에 멀리 떠나지 않아도 우리네 매일이 다른 것일 테고요.

  지구의 입장에선 우리네 삶도 이슬처럼 잠깐일 텐데, 우리는 이 계절 속에 얼마나 더 머물 수 있으려나요…

🔎책이라는 만듦새, 우리의 만짐새

난다는 책을 뜯어…

  제목의 ‘네Nez’부터가 프랑스어로 코 또는 조향사를 뜻하는 이 책. 그에 걸맞은 만듦새 또한 저희 자랑인데요, 흔히 ‘포클로스’라 불리는 패브릭으로 감싼 책등과 왼 귀퉁이가 포인트! 향에 관한 책인 만큼, 이 검은 천 부분이 ‘시향지’ 역할이라면 어떨까 하고요. 요즘 페이퍼 인센스, 향기 나는 북마크 같은 제품들도 더러 있지만, 표지부터 내가 사랑하는 ‘향을 머금은’ 책이 있다면 어떨까… 낭만 한 방울 담아 시도해본 제본이랍니다.

  포클로스(또는 포크로스)라는 용어는 베, 천을 뜻하는 한자 포布와 영단어 클로스(cloth)가 결합된 것이라고 해요. 또 이렇게 책등을 중심으로 한쪽 귀퉁이를 덧대는 제본법을 가리켜 양장을 위한 ①합지에 표지 종이를 입히는 ②(싸)바리 그리고 ③포클로스까지 ‘삼중(싸)바리’ ‘삼중 바름’이라 하고요. 새로운 용어만큼 책을 엮기까지 품도 늘어나는 법이지만, 난다의 삼로三露 피 땀 눈물(p ; ㅠ)이라 어여뻐해주셔요 😓🤣

  진정한 향기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언젠가 느꼈던 감각, 기분, 기억, 그리고 추억. 향수에는 조향사의 여러 조각이 녹아들어가기 마련이다. 톨스토이가 예술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조향 역시 지극히 섬세한 예술이다.

─김태형, 『나는 네Nez입니다』, 16쪽.

• 9월 15일:   민병헌 『민병헌 사진집 누드』 | 김탁환 『아비 그리울 때 보라』

• 9월 16일:   윤제림 『걸어서 돌아왔지요』

• 9월 19일:   김남일 『수원을 걷는 건 화성을 걷는 것이다』(걸어본다 17)

• 9월 20일:   김경주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 아주 사적인 난다의 오늘

이사, 사이와 사이

 오늘 사적인 난다 이야기는 김동휘 에디터의 사담, 길고 긴 이사담! (사설이 조금 깁니다.)

  경상도에서 상경하고 10년도 훌쩍 넘어갈 동안 내내 ‘세’를 들어 살았다. 흔히들 그러듯이. 보증금 없는 달셋방으로 시작해 500만 원에 얼마 하는 월세로, 대출 땡겨(!) 또 전셋집으로. 아직 ‘내 집 마련’은 소박하고도 원대한 꿈으로 남아 있다. 다들 그렇듯이.

  사는 동안 새로 사는 물건 많고 ‘또 못 버린 물건들’은 더 많으니, 특히나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책, 또 책들. 쌓인 책이 집밖으로 터져나갈 지경에 이르면 출세가 없어도 반 평이나마 넓은 집을 찾아나서야 한다. 책도 짐도 비우는 법 좀 배우면 좋으련만, 책만 쌓으면 뭐하나, 비움도 배움도 도무지 없는 거다.

  아무튼 급한 대로 언덕배기에 위치한 구옥 빌라를 계약했다. 4층 건물의 꼭대기층이라 해가 잘 들고, 무엇보다 넓은 테라스가 있었다. 그러게, 작은 옥상정원을 만들어야겠다. 직사광선에 취약한 책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식물들은 분명 좋아할 테니까. 좁은 집에서 나를 쫓겨나게 한 죽은 나무들 대신, 산 풀들 위한 새집을 만들 테다.

  그렇게 덜컥 계약을 한 것이 12월. 9개월 흘러 이제 식물들 무럭무럭 자라나 비밀정원 되었는가 하면… 아직도 이사를 못했다. 팔자에도 없는 두 집 살이의 나날. 이 집과 저 집 사이, 이 삶과 저 삶의 사이에 낀 채 오도 가도 못하는 셈이랄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몸이 좀체 동하지 않는다. 있음에 머무는 건지, 옮김에 머뭇대는 것인지.

  겨울에 계약한 집에 봄이 오고 여름도 오고. 올여름 그야말로 폭우였으니, 비를 뚫고 새집 돌볼 자신이 없어 장마가 가고서야 오랜만에 집을 들렀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천장에 비가 샜다. 30년도 더 된 집의 꼭대기층인지라, 옥상 방수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주방까지 비가 스민 모양이다. (K-오컬트) 토속 신앙의 열렬한 추종자로서 말하자면, 사람이 사는 집엔 터를 돌보는 신도 함께다. 예컨대 성주신, 조왕신, 측신 등등. 문득 이 모든 게 내가 아직 이사를 않아서 그런 걸까, 집 돌봐줄 누가 없어서…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이사를 서둘러야겠다.

  (토속 신앙 쪽으론 나보다 프로페셔널이라 할) 어머니는 항상 손 없는 날에 맞춰 이사를 했다. 음력 9일과 10일, 8개의 방위에 대응되지 않아 귀신들도 갈 길을 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날. 문제는 이 날을 노리는(!) 이가 나뿐만 아니니, 손 없는 날엔 이사 업체에 예약을 잡기도 힘들고 가격도 비싸다는 거다. 그래서 첫 자취를 시작하던 날 어머니가 일러준 지혜가 있는데, 이삿짐은 못 옮기더라도 손 없는 날 미리 들러 밥을 짓고 김을 피우라는 것. 아궁이에 불을 때고 밥을 짓는 것이 ‘내가 이 집에 산다’ 하고 공표하는 셈이라 한다.

  아직 책도 무엇도 없는 텅 빈 집에 1인용 전기밥솥을 갖다놓고 ‘백미 쾌속 취사’를 눌렀다. 잠시 기다리면 친절한 알림(‘증기 배출이 시작됩니다’)과 함께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볼 수 있다. 아직 둘 곳이 마땅찮아 대충 주방 상부장 아래에 두었는데, 푸슉거리며 솟아오른 수증기가 찬장 아래에 방울방울 맺힌다. 이슬처럼. 사실 김이든 이슬이든 수증기가 물방울로 맺히는 일이라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기는 하다.

  이제 사람 사는 집입니다, 공표는 마친 셈이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해둘 겸 빈집에서 하룻밤을 잤다. 누워서 천장을 올려다보면 천장엔 물 맺힌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고 보면 노숙露宿이란 말은 짐작과 달리 길 로路가 아니라 이슬 로露를 쓴다. 노출露出이나 폭로暴露처럼 ‘드러내다, 밝히다’라는 뜻이 있긴 하지만, ‘밖에서 자는 일’보단 ‘이슬을 맞으며 자는 일’이란 해석 쪽이 마음에 든다. 오늘은 이곳과 저곳의 사이, 머무름과 머무름의 사이. 지붕이 있고 천장이 있어도 노숙이 되는 밤.

  어쩌다보니 9월은 난다 대이동의 달이 되었다. 난다 식구 여럿이 살던 집을 옮기고, 난다의 서브오피스 격인 ‘탐난다’도 최근 이사를 했다. 마침 이곳도 4층, 옥상정원엔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그러게, 옮김에도 때가 있어 때를 기다렸나보다. 오늘은 백로, 5일 뒤인 초후初候는 먼길 떠난 기러기가 돌아오는 때라고 한다.

🎙 5분 만에 5문 5답

오은 시인과 함께, 우문즉답

오은 시인(은) 그리고 김동휘 편집자(휘)

우문 ①

휘:  최근에 이사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소감이 어떠십니까.

은:  비가 와도 초조해지지 않는다! 이전 집에 누수 이슈가 있었기 땜에… 옮긴 후엔 바람 불고 비가 와도 초연해졌지요. 드디어 책장이 들어왔고 어떤 방식으로 꽂을지 고민을 해봐야 할 때… 제일 많은 짐은 당연히 책. 4~50박스 정도 나올 줄 알았는데 책만 120박스를 날랐네…

휘:  책과 누수가 언제나 우리를 괴롭혀…

우문 ②

휘:  오늘은 밸런스 게임으로 진행해볼까 해요. 첫 질문, 거주지 이사 vs 난다 명예 이사

은:  당연히 후자지! 지속성이 있잖아. 난다 명예 이사는 종신직 아닙니까? (아, 보장은 못한다고?) 그치만 거주지는 어차피 또 떠나야 하는걸…

휘: 인생은 나그네 길… (🎵…)

우문 ③

휘:  (삶의 단계마다 가치관은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지금 이 순간, 머물러 안정된 삶 vs 멈추지 않고 떠나는 삶

은:  이것도 후자! 새로운 곳을 가야 새로운 것이 보이고 새로움을 배우는 게 나더라고. 이제는 뜨내기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죠.

휘: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

우문 ④

휘:  국어사전의 요정, 문해력 권위자 오은 시인 아니겠습니까. 두 단어 중 하나를 고른다면, 머무르다 vs 머뭇거리다

은:  머무적거리다! 작은 일에도 우유부단하고 머무적거리는 게 나니까. 근데 그거 알지? 이런 사람이 큰 결정은 또 빨리 내린다? 대학원을 뜬금없이 공대로 가고 이런 건 금방 결정하는데, 점심 뭐 먹지 노트 색깔 뭐 사지 이런 건 한참 머뭇… (아 그나마 요즘은 주황색이 시그니처가 돼서 그냥 주황 고르는구나…) 또 머뭇거린다는 게, 사실 멈춰 있는 것 같아도 계속 움직인다는 뜻이잖아요. 정지해 있는 듯해도 그 멈칫 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끼는.

휘:  정중동靜中動! 거의 머뭇거림의 미학인데요…

우문 ⑤

휘:  곧 은희경 작가님과 북토크가 예정돼 있잖아요, 이번 이사에서 드디어 버린 물건 그리고 또 못 버린 물건 하나씩 꼽아본다면?

은:  드디어 버린 물건은, 처음 돈 벌어서 샀던 노트북! 골동품 같은 거지. 쓰지도 않으면서 이사 때마다 계속 들고다니고, 그런 거 있잖아요, 처음이라는 의미가 있으니까. 이사 전에 버렸냐면… 아니고, 새집으로 오고 나서 맘 굳게 먹고 드디어 처분!

또 못 버린 물건은 독서대. 사실 전 독서대를 태어나서 한 번도 안 써봤어요. 어떤 편의가 있는지를 모르겠어서… 책은 자고로 모로 누워 읽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주변의 훌륭한 독서가들이 독서대를 쓰니까, 언젠가 꼭 나도 써보리라 차마 버리지 못하고 들고 왔죠. 원목으로 된 고급 독서대이기도 하고… (물론 아시다시피, 원목에 고급이라는 것은 암것도 모르는 저의 자의적 판단입니다.)

그치만 아무리 생각해도, 누워서 읽는 독서대 개발이 시급합니다. 왜 없는지 모르겠어.

휘:  (사진)

🚪닫는 문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도

  이슬, 잠시 머무는 일 얘기를 실컷 하고나니 문득 박준 시인의 문장이 떠올랐네요.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우리에게도 있었다”(「마음 한철」). 계절과 절기 이야기에 진심인 소문난다는 매번 한철, 그래도 그 마음만큼은 ‘전부’ 진심이기를, 그리하여 투명하게 빛날 수 있기를, 그런 바람으로 오늘의 작은 문 닫아보아요.

  멈춤 아닌 머뭇거림, 이내 오래 머무를 마음이기를요!

추분秋分에 돌아올게요. 또 만나요! 🤗

• 『또 못 버린 물건들』 출간 기념, 은희경 작가와의 북토크 예매가 시작되었어요
  
  
  📍 일시: 9월 17일(일) 오후 5시
  📍 장소: 마포중앙도서관 6층 마중홀 (서울 마포구 성산로 128 6층)
  📍 출연: 소설가 은희경, 시인 오은(사회)
  📍 인원: 선착순 300명
  * 참여해주신 모든 분께 난다에서 준비한 아주 소박한 '어떤 물건'을 증정해드릴 예정입니다. 
  * 강연이 끝난 후 사인회가 예정되어 있어요!
  
  신청은 요 링크에서 👉🏻 은희경 작가와의 북토크 예매하기
  
  
• 『엄마는 해녀입니다』의 저자 고희영 감독님의 신작 다큐멘터리 <물꽃의 전설>이 개봉했어요! 그림책 『엄마는 해녀입니다』 실제 주인공의 이야기! 절찬 상영중🌊
  👉🏻 <물꽃의 전설> 영화 소개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