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세번째 소문 〰
2024년 1월 6일 ∷ 소한小寒 ∷

  끝났지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이야기냐고요? 해를 넘겼음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겨울 절기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다음주에 우리를 찾아올 책, 박연준 시인의 『듣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깨달음은 별안간 옵니다. 깨달음은 ‘사실’과 ‘진실’이 충돌하는 교차로에서 태어난 유령. 저는 그 유령을 ‘고전’이라 부르겠습니다. 우리가 죽었고, 죽고, 죽을지라도 어떤 책들은 살아남습니다. 살아남아 산 사람들 손에 끈질기게 잡히는 책을 저는 또 고전이라 부르겠습니다.

  무언가가 끝날지라도 그 ‘끝남’ 속에 여전히, 언제나 남아 있을 책, 그리하여 끝남과 새로운 시작을 이어줄 책, 과거와 현재가 공명하며 끊임없이 재탄생하는 책, 우리는 그런 책을 ‘고전’이라 부릅니다. 『듣는 사람』은 우리 곁에서 머물며 ‘고전’이라 불리는 이 서른아홉 권의 책을 이야기하고요.

 

  세상을 떠난 이들의 책이 모두 고전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또 고전이라 불리는 책의 저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것은 아니지만, 이 책에서 박연준 시인은 우리를 떠난 이들이 남긴, 그중에서도 고전이 된 글을 열심히 모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이 고전들이 마치 죽은 이들의 전언과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박연준 시인은 누구보다 그들의 말을 ‘공들여 듣고’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도 같고요.

  이 책, 표지 이야기를 안 할 수 없겠죠.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에 이어 김은정 작가와의 두번째 협업인데요.

 

  그림의 제목은 <읽는 사람>. 제목부터 <읽는 사람>이라니, 이 협업 처음부터 예견되었던 일이 아닌가 싶네요. 이 그림, 알고 보면 재밌는 정보 하나 알려드리자면, 조지아 오키프의 구름 연작을 오마주한 작품으로, 오키프의 구름 너머에는 어떤 풍경이 있을지 김은정 작가가 그 풍경을 이어 그린 것이라고 하네요.

 

  그림을 찬찬히 보니 가로로 흩어지며 불규칙적인 패턴을 만들어내는 구름 그 너머 풍경 속에서 한 여자가 앉아 책을 읽고 있네요. 그 여자가 앉아 있는 곳은 어쩌면 푸른 해변 같기도 하고, 꽁꽁 언 호수 같기도 하고요. 그 위로는 검붉게 세로로 세워진 직사각형들, 그 너머로는 거대한 빙산들이 첩첩이 이어지고요.

 

  각자가 그림을 보는 각자의 방법이 있으니, 오늘 저에게 이 그림이 어떻게 보였냐면요. 가로로 길게 이어지는 구름과 해변(혹은 호수), 그 불확실하고 추상화된 배경이 마치 켜켜이 쌓인 종이 같았어요. 또 그 전체는 하나의 책, 혹은 무수한 책들 같았고요.

 

  그렇게 보니 책의 물성을 닮은 배경 속에서 한 여자는 또다시 자기 손에 쥐어진 자그마한 책을 읽네요. 책 속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의 모습. (어쩌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듣는 사람』을 염두에 둔 해석을 해버린 걸까, 편집자로서 스스로의 (목적성 너무 뚜렷한) 무의식에 놀랍니다…) 이왕 그렇게 본 김에 계속 보면, 가로로 흩어지는 구름과 호수(혹은 해변) 너머 그에 대비되어 세로로 우뚝 선 형상들은 어쩌면 책을 읽는 사람의 정신 속에서 펼쳐지는 광대한 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사설이 길었네요. 김은정 작가는 이 그림에 대해 “불확실한 변화들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읽어내는’ 사람이고 싶다”는 마음을 이야기했고요. 박연준 시인은 “꽁꽁 얼어붙은 세상 한가운데 앉아 기어코 책을 읽는 사람, 타인의 말을 공들여 듣는 사람”의 존재를 꿈꾸었어요. 두 분의 마음을 따라 올해는 ‘공들여 듣는 사람’이 되는 한 해가 되기를 저도 희망해봅니다.

“독서는 남의 말을 듣는 행위고

듣기는 침묵이란 의자에 앉아 있는 일이다.

타인의 생각 속에서 기다리고 머무는 일이다.

혼자 책 읽는 사람을 보라.

침묵에 둘러싸여 얼마나 아름다운지!”

  조선시대 문인들의 풍습 중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라는 것이 있어요. 동지부터 아흐레마다 추위가 조금씩 누그러져, 이것을 아홉 번 반복하면 추위가 가시고 봄이 온다고 믿었던 거지요. 동지부터 9×9＝81일이 지나면 대략 경첩과 춘분의 사이, 3월 초순이니 얼추 맞는 계산이 됩니다. 그래서 동짓날 선비들은 아홉 매화 가지에 아홉 송이 흰 매화꽃을 그렸다고 해요. 다음날부터 하루에 한 송이씩 매화를 칠해 홍매를 만들어나가면, 81일이 되는 날 창문 밖으로 진짜 매화가 핀다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