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스 메카스라는 이름이 머릿속에 들어온 건 어느 소설을 읽은 뒤였습니다. 소설 속 이야기입니다. 소설에는 왠지 아주 먼 옛날을 상상하게 만드는 묘한 이름의 인물이 나오는데, 그 인물은 요나스 메카스의 영화를 본 뒤 그에게 대뜸 편지를 씁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답장을 기대하지 않은 편지였지만 답장은 옵니다. 거기에는 단 한 문장이 쓰여 있었고요.

  “아름다움이란 후회하는 것입니다.”꙳

 ꙳ 배수아,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워크룸프레스, 2019.

  그후로 기회가 되면 상암에 있는 영상자료원에 찾아가 요나스 메카스의 영화를 보곤 했습니다. 리투아니아 출신으로 2차세계대전 이후 뉴욕에 정착한 메카스의 삶은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와 함께하는데요. 그는 영화 평론지 『필름 컬처』를 창간하였고 독립 영화인들의 조합인 시네마테크를 결성하기도 하였습니다.

  메카스의 영화는 ‘필름 다이어리’라고 불립니다. 일기를 쓰듯 매일매일을 기록하고 이어붙인 그의 영화는 덧없이 사라지는 삶의 순간들을 포착합니다. 그저 한 사람의 일상을 기록한 영상을 본 것뿐임에도 그의 영화 제목처럼 어떤 아름다움의 섬광을 본 것만 같죠.꙳

요나스 메카스, <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 2000.

  일상을 이렇게 섬세하게 기록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남긴 글도 그만큼 아름답지 않을까?

  메카스의 글을 찾아 읽게 된 계기였습니다. 실제로 다양한 글을 남긴 메카스(뉴욕으로 넘어오기 전 그는 리투아니아어로 시를 쓴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소개해드리는 두 책은 그가 남긴 일기를 모은 것으로, 유년기를 제외한 그의 거의 온 생애가 담겨 있습니다. 메카스 자신이 직접 원고를 선별하고 편집을 했으니 그의 영화 작업에 상응하는 글이라고 볼 수 있겠죠. 물론 이 글은 2차세계대전 전쟁 포로의 수기, 미국 아방가르드 운동에 대한 생생한 증언 등의 성격도 있어 해당 시대와 주제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흥미롭게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주제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더라도) 저에게 이 책은 단지 다른 모든 삶과 비슷했고 또 그 어떤 삶과도 달랐던 하나의 삶을 담은 기록으로 읽힙니다. 그 삶에 깃들었던 생명력을 그대로 간직한 기록 말이죠.

1950년 1월 11일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분에 따라 사는 것만 같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반복하는 것도 같다. 어떤 실수들은 아름답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실수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 아마 그래서 그런 걸지도. 나는 어느 것하고도 어느 누구하고도 확실한 유대 관계를 맺지 않으려 한다. 계속해서 머물고 싶은 장소와 순간이 있긴 하다. 아니, 그러다가도 나는 곧장 떠난다. 난 친밀함, 행복의 섬광을 슬쩍 보는 것도 같다. 짧고 강렬한 섬광. 그런 순간들이 길어질 수 있다고, 오래 이어질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다른 순간들을 찾아서. 내 본성이 이런 걸까 전쟁이 날 이렇게 만든 걸까? 질문을 달리하면 이렇다. 나는 추방된 자로 태어난 걸까 아니면 전쟁이 그렇게 만든 걸까? 살아가는,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으로서 쫓기듯 이동하기. 결코 집에 머물지 않고, 언제나 움직이며. 

  아직은 1월, 대한이니 마지막 절기네요. 다가올 2월, 입춘이니 봄이 지척이고요. 그러고 보면 절기節氣라는 말도 계절季節이라는 말도 그 안에 ‘마디節’를 품고 있는데요, 시간이란 계절이란 마냥 흐르는 것 아닌가, 우리는 어찌하여 자꾸만 무엇을 나누고 가르고만 싶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우리는 알지요. 1월과 2월, 어제와 오늘, 그때와 지금을 말할 때 우리의 속내, 하릴없이 흘러가는 이 시간들 냉큼 담아 고이 간직해두려는 작정이라는 것. 일기에도, 편지에도, 우리가 모년 모월 모일 날짜를 새기는 것 그 때문인 거지요. 흐르는 시간에 또박또박 마디를 새기는 간곡한 마음.

  난다가 선보이는 새 시리즈 시의적절도 그러한 마음에서 꾸려본 것이었어요. 우리의 1월은, 2월은, 그리하여 12월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콸콸 흘러가는 시간들 잠시나마 붙잡아 품어보자 하고요. 하루에 한 편씩, 그리하여 하루에 하루를 품어 돌보고 또 돌아보는 마음.

  12명의 시인이 함께하는 릴레이라 하였으니, 흐름 속에 이음도 있을 테지요. 시의적절 1월 김민정 시인을 소개하는 2월 전욱진 시인, 이미 만나들 보셨을까요? (👉시의적절 라이브 김민정×전욱진 보러 가기) 말 나온 김에 흐르듯 슬쩍, 입춘만큼 지척에 다가온 그 책, 전욱진의 2월 『선릉과 정릉』 소개해보려고요.

  ‘2’라는 숫자 참 이상하지요. 둘이라서 다정인데 둘이라서 하나는 아닌, 그 ‘따로’라는 거리. 달력의 시작은 1월, 봄의 시작은 3월, 시작과 시작의 틈에 엉거주춤 선 ‘사이’라는 거리. 하필 짧고도 추운 2월,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손잡고 가고/저 둘이 같이 있어도 된다는 사실을/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이 달. 하지만 “절망과 싸우느라 한데 뒤엉켜/부둥키고 뒹구는” 모습을 보며 그마저 “사랑이라” 부르는 시인이 있지요.(「어두운 포옹」)

  그래서 오늘 나의 하루에 관해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어저께 산 무화과가 든 빵을 먹었고. 당신한테 편지를 쓴 다음, 카페에서 책을 좀 읽을 겁니다. 집으로 가선 저녁으로 콩나물밥을 해 먹을 거고. 어떻게 하면 끝내주는 양념장을 만들 수 있을까 잠시 궁리할 거예요. 먹어보고 맛있으면, 나중에 내가 좋아하게 된 사람들에게 대접할 수도 있겠지요. 그 광경을 그려봅니다. 물론 그런 장면에는 항상 당신이 끼어 있고. 지금은 머릿속에만 있는 장면이 언젠가 현실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전욱진 시인은 ‘사랑’이다, 그 이야기 하고 싶었답니다. 카페에 앉아, 침대에 누워, 버스 안에서,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들으며,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 생각이라는 사랑을 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은 시를 씁니다. 사랑하니까 편지를 쓰고요, 오늘의 사랑을 일기에 남기지요. 음악 또한 사랑하는 전욱진 시인이라, 시와 편지와 일기와 노트 사이, 이 책 『선릉과 정릉』 곳곳에도 음악이 흐르는데요, 그러니까 시인에게 사랑과 음악은 같은 것인지도, 언제나 귓가에 흘러 시간을 함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욱진 시인이 사랑으로 보낸 2월 『선릉과 정릉』은 1월 말 만날 수 있어요. 조금 이른 봄소식이다 여겨 기다려주시면 그 또한 사랑일 테지요. 뭐라 뭐라 해도 ‘둘’이라는 거, ‘2’라는 거, 사랑 아닐 리 없으니까요.

  시간처럼 계절처럼, 시처럼 강물처럼 눈물처럼 흐르는 것이 사랑. 그러니까 비처럼, 아니 음악처럼.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해볼까? 싶어 해보자! 하고 음악들 골라 담아보았어요. 『읽을, 거리』 김민정의 1월에는 어떤 배경음악이 흐르고 있었을까 상상해보는 일. <읽는 사람>에서 『듣는 사람』으로 흘러가본 셈이려나요?

  우리의 오늘에도 사랑처럼 흐르는 음악 있을 테지요. 오늘 내 하루의 BGM은 무엇이면 좋을까. 내 인생의 OST 어떤 곡으로 삼아볼까. 그런 상상과 함께 하루씩 읽어나가면 저마다의 플레이리스트 풍성할 테지요. 언젠가 꼭 들려주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