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입니다. 시작이지요. 절기를 챙기는 이들은 오늘부터 2024년을 셈할 테고요. 절기는 태양력을 따르다보니 음력을 기준으로 한 우리네 설날과 항시 딱 맞지는 않지만요, 겨울이 끝나고 땅이 슬슬 달구어지는 요 봄의 문턱을 한 해의 시작으로 삼은 것은, 해로 봐도 달로 봐도, 각오와 다짐과 뜻 ‘세워보자’ 하는 일이겠습니다. 중국의 설날을 춘절春節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이름법일 테지요.

  입춘이라고 볕과 숨이 아주 봄은 아니어서, 우리로선 경칩이나 춘분쯤은 되어야 ‘아, 봄이구나’ 열리는 소리 나오기 마련이에요. 절기의 이름들이 대개 그러한 까닭에 입하 입추 입동 이름을 대보면 다들 벌써? 하고 묻게 되지요. 아직은 봄 안 아니고 ‘봄 앞’에 서 있는立는 오늘. 계절의 초입에, 문턱에 선 우리들.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땅 아래선 봄이 움트고 있을 테지요.

  그러고 보니 설날이라 발음해보면 꼭 일어설立 날처럼 들리기도 하네, 혼자 웃을 요량으로 검색해봤는데요. 웬걸, 실제로 ‘설’의 어원에 관한 몇 가지 설說 중 새로 선 날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더라고요. 그 밖에 새해의 첫날이니 아직은 낯설다 하여 설날이라는 설, 우리말로 나이를 세는 ‘살’과 같은 어원이라는 설, 자중하고 근신한다는 뜻의 섦다에서 왔다는 설 등이 있어요.

  저마다로 그럴싸하고 그럴듯한 추측이지요. 그중에서도 갑진년 오늘, 낯선 시간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얼굴을 떠올려봅니다. 봄도 시작도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이참에 일어나 기지개 한번 크게 켜보면 좋겠다 하고요. 쭈뼛쭈뼛 혹은 데면데면 아직은 멀찍이 낯가리고 있는 새봄, 우리가 먼저 다가가 손 내밀어보면 더욱 좋을 테지요.

  따뜻하라고 봄이니까요. 씩씩하라고 시작이니까요. 올해는 새해와, 친하게 지내자고요, 우리!

  걸었고, 다가가서, 멈췄다.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숲의 문을 여는 이는 없었다. 모두 살아가기를 그만두었던가? 이제 움직이는 갈대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벼운 속삭임이 땅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한곳에서 다른 한곳으로 지나갔다. 그 위로는, 울음소리만이, 그 존재를 짐작만 할 뿐인, 보이지 않는 새들의 울음소리만이 흩어졌다. 하늘과 그 반영들 사이. 오직, 미동도 없는 공간만이, 그리고 그 웅얼거림의 한가운데에, 영원이.꙳

  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봄은 보이지 않습니다. 겨우내 간간이 쏟아지고 흩날렸던 눈은 모두 녹았고 풍경은 지난 계절의 흔적들이 모두 거추장스럽다는 듯 헐벗었습니다. 말라 있는 나무들의 색은 흙빛을 닮은 것 같습니다.

  지난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다가올 것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계절. 이것이 봄을 향한 입구라면 우리는 아주아주 두꺼운 문지방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무언가가 없음은 무언가가 있었음을, 또 무언가가 여전히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단조로움 속에서 단조롭지 않은 무언가를 본다면 그것은 단순히 지루함을 타파하기 위한 시신경의 착각일까요, 아니면 그 단조로움 내부에 잠재하고 있는 어떤 것을 꿰뚫어본 것일까요.

  이 계절에 필립 자코테의 책, 『부재하는 형상들이 있는 풍경』을 다시 꺼내본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 책은 제목부터 모순적입니다. ‘부재하는 것이 있다’는 모순, 결국 그것을 담고 있는 전체로서 풍경. 자코테는 이 산문시집에서 줄곧 자신이 바라보는 풍경들을 묘사합니다. 특별히 풍요로울 것도 없는, 눈이 휘둥그레지게 장엄하지도 않은, 오히려 헐벗은, 그저 침묵 속에 놓인 풍경입니다.

  그 단조로운 풍경에서 자코테는 영원을 감지합니다.

  때론 보이지 않는 것이 무한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보이는 형상의 아름다움 가운데 보이지 않는 것”.꙳ 언젠가 이런 표현을 보고 메모를 해둔 적이 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것’이 어쩌면 아름다움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장 뤽 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 이만형 정과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

  ‘봄이 온다’고 말하면 봄을 오길 고대하는 사람이든, 겨울을 떠나보내기 싫어하는 사람이든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봄을 상상하게 됩니다. 봄의 다가옴을 예비하게 됩니다. 그런 게 말의 힘인 걸까요. 한편 지구 어딘가에는 봄이 지상을 결코 떠나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해발고도 900미터에 자리잡은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의 이야기입니다.

  베네수엘라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상단에 위치해 있습니다. 국토의 서쪽으로는 설산이 이어진 안데스산맥이 있고 동남부로는 전형적인 열대우림기후를 보이는 아마존 밀림이 있지만 그 수도 카라카스는 16도에서 26도의 온도를 벗어나지 않는 온화한 날씨가 이어집니다. 다이내믹한 사계절을 매년 경험하는 한국 거주자 입장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풍토가 아닐까 하네요. 입춘이라지만 봄은 여전히 멀리 있고, 상춘의 도시는 어딘가 있다지만 막연하기만 합니다.

  멀리 있는 것을 떠올려봅니다. 그런데 가끔 무언갈 조우하는 최초의 순간이 지난 후, 그 인상이 조금은 퇴색되고 흐릿해진 후에 도리어 명료해지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프루스트도 어떤 걸 경험한 그 순간엔, 어떤 그림을 보거나 음악을 감상한 직후엔, 그것들이 촉발한 감각의 정체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의 글쓰기가 힘을 발휘한 순간은 언제나 일정한 시간이 흐른 후, 그 순간을 돌아볼 때였다고 하죠.

  『카라카스 수업의 장면들』에는 서정 작가님이 카라카스에서 2년 남짓한 시간을 보낸 경험이 담겨 있습니다. 미지의 도시인 카라카스에 떨어진 완벽한 이방인이 그들의 언어인 스페인어를 배우고 조금씩 다가가 끝내, 그들과 어떤 사귐을 맺게 되었던 시간을 담고 있습니다. 차베스, 심각한 경제 공황…… 책을 읽다보면 이런 단편적인 지식 너머 그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차츰차츰 그려집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고난받고 무엇으로 가슴 뜨거워지는지” 알게 됩니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지구 반대편 베네수엘라 이야기를 읽어야 할 이유가 뭘까? 이 책을 편집하면서 스스로 계속 물었던 질문입니다. 최근 작가님과 오래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찾았던 답이 작가님의 답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그것을 읽는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포함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흥미롭게 느껴질 때면, 언제나 ‘아, 나는 이런 걸 흥미로워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자각이 함께합니다. 그러니 독서는 언제나 되돌아봄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멀리 갈지라도요.

  독서가 되돌아봄이라면, 책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거울일 테지요. 그렇다면 가장 먼 곳을 봤을 때 가장 명료하게 되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너무 가까운 곳에서는 되돌아볼 공간이 생기지 않으니까요. 과도하게 친숙한 것들에는 이미 내가 너무 끼어들어 있으니까요.

  편집을 맡았던 저에게 이 책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부분까지 스스로를 다시 볼 수 있게 해준 선명한 거울이었습니다. 봄의 부재 속에서 봄의 존재를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듯, 강렬한 순간이 지나간 후에야 그것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인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듯, 가장 먼 곳으로 여행함으로써 우리는 정주하는 곳과 더욱 가까워지게 됩니다.

  예전만큼 흔치는 않지만 요즘도 현관과 대문에 한자로 쓴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입춘방立春榜' 붙여놓은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가득하기를. 봄이라는 손님을 내 집으로 맞이하는 인사이기도 하지만, 길 가다 문득 마주치면 꼭 집 앞을 지나는 얼굴 모를 모두를 향한 조건 없는 응원이자 축원 같아 마음 넉넉해지기도 합니다.

  입춘에 챙기는 절식節食 중 오신반五辛盤이 있어요. 눈 속에서 싹을 틔워올린 다섯 가지 산채를 살짝 데치거나 겨자, 식초 등에 무쳐 내는 음식이라지요. 움파, 산갓, 당귀싹, 승검초, 부추 등 다양한 봄나물이 상에 오른답니다. 입춘채立春菜라고도 부르는 요 햇나물에는 계곡과 산야에서 겨울을 견뎌낸 산채들을 통해 그 씩씩함을 몸안으로 들여본다는 의미가 있어요. 영양 면에서도 겨울 동안 부족했던 채소 섭취를 보충하게 되고요.

  견딤 끝에 비로소 오는 것들, 어김없이 다시 시작되는 것들. 다짐과 바람이란 스스로 세우는 것이지만 밖에서 오는 응원과 격려로 씩씩 일으켜지는 날도 있습니다. 혹 1월 1일 새해 첫날 다짐만 했던 것들, 마음만으로는 모자라 작심만으로 사흘이었던 것들 있다면 진짜 시작은 지금이라고, 우리의 시작은 언제나 다음이라고, 올봄을 대신해 응원 보내어요. 벌떡 일어나면 그뿐, 칠전이면 팔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