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꼭 비처럼 오네.’

  며칠 전 서울과 파주에는 눈이 내렸습니다. 눈이라곤 하지만 하얗다는 것 말고는 어떤 부분도 눈 같지 않은 눈이었죠. 꽤 많은 양이었지만 펑펑 내리지도 않고 저들끼리 모여 눈줄기를 만들어 쏴- 하면서 내리더니 땅에 닿자마자 물이 되어 흘러내렸습니다. 어차피 녹아버릴 텐데 내리는 모양부터 비를 닮다니, 자기 운명을 앞서 차지하려는 아주 다급한 눈이구나 싶었죠. 

  눈이 기다림이라면, 비는 그 기다림이 머무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무수한 줄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비이기에 그렇게도 많은 얼굴로 오는 것도 같습니다. 눈이 되어 내리는 비(진눈깨비), 얼음으로 내리는 비(우박), 안개와 함께 오는 비(는개)… 

  (진눈깨비이든, 우박이든, 는개이든) 내리는 비는 그 뒤로 자리잡고 있던 풍경을 흐립니다, 뒤섞습니다, 지웁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가만히 앉아 비와 함께 지워지고 새로 그려지는 풍경을 바라봅니다. 그렇게 다시 찾아올 봄의 풍경을, 그리고 그 너머로 계속 이어질 사계절의 풍경을 그려봅니다.

  상강의 서리, 소설 대설의 눈, 백로 한로의 이슬 그리고 오늘 우수의 비雨. 모습은 다르지만 모두 ‘물’의 또다른 이름들이지요. 절기란 농경에 맞춘 것이니 물의 역할 빠질 수 없겠고, 날씨 역시 물의 대류 현상을 포함하는 법이니 더욱 그럴 테고요. 그중에서도 우수는 비와 물 혹은 빗물이라는 뜻이라 그런가, 유독 결정의 모습이 아닌 내리고 흐르는 액체, 동적인 물을 떠올리게 합니다.

 

  저기압 고기압, 흐림과 맑음. 흔히 기분이나 마음의 상태를 날씨에 빗대곤 하지요. 반대로 우중충한 날이면 어쩐지 기분도 축 처지고, 화창한 햇빛 아래선 기운 쑥쑥 자라는 것처럼 기분이 날씨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요. 그래서 ‘마음의 형태’라고 하면 차갑고 딱딱한 얼음, 김 펄펄 끓어오르는 냄비, 어둡고 서늘한 심해… 자연히 다양한 물의 이미지들을 연상하게 됩니다.

 

  실은 이상남 작가의 개인전 《Forme d’esprit(마음의 형태)》의 제목을 보다 떠올린 생각들이에요. 마음… 뭘까? 하는 질문에서 이어진 거지요. 마음이 꼭 내 마음 같지 않고 마음처럼 쉽지 않아 마음처럼 되지 않으니 알다가도 모르겠는 나의 마음…

  기하학적인 도상 혹은 도형. 기호 같기도 추상 같기도 한 이상남 작가의 이미지들은 심지어 표면마저 매끈해 우리가 익히 아는 그림, 회화라기보다는 컴퓨터 그래픽이나 프린팅 작업처럼 보이기도 해요. 이걸 사람 손으로 그렸다고? 듣고서 봐도 의심이 쉽게 가시지 않는 묘한 화면이지요. 이런 낯섦으로 관객이 그림을 들여다보는 몇 초의 순간, 잠깐이라도 작품 앞에 멈춰 사유하도록 관객을 붙잡기 위해 이상남 작가는 50~100회 이상 물감을 칠하고 갈아내고 덮기를 반복합니다.

 

  40여 년간 페인팅은 물론 ‘설치적 회화’와 퍼포먼스 등 미술계를 종횡무진 누벼온 이름이지만 어쩐지 국내에서 접할 기회는 흔치 않았던 것 같기도 해요. 1981년 뉴욕으로 이주해 지금까지 미국과 세계를 무대로 ‘글로벌’한 활동을 이어온 것이 한 이유일 테지요. 이번 개인전이 열리는 페로탕 갤러리 역시 서울, 파리, 뉴욕, 홍콩, 도쿄 등 세계 7개 도시에 지점을 둔 국제적인 화랑이기도 하고요.

 

  이런 이상남 작가를 일찌감치 주목해 그의 작품세계를 낱낱이 추적해온 또다른 이름이 있으니 바로 채호기 시인이랍니다. ‘덕질’에서 우정을 넘어 감응에 이르기까지, 가히 ‘이상남의 모든 것’이라 불러 손색없을 자료를 모아왔어요. 때로는 현미경처럼 더러는 망원경처럼 다각으로 살펴낸 분석에 뉴욕과 안양을 오가며 남긴 서면과 대면, 두 차례의 대담을 더해 책으로 엮기도 했답니다. 물론 난다에서 소개하는 바,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입니다.

  시인의 눈으로 본 그림, 혹은 문학과 회화의 만남. 사실 난다가 워낙에도 사랑하는 것이 이런 만남이기는 하지만요, 내공이랄까 연륜이랄까, 채호기 시인과 이상남 화가가 나누는 대담이란 날 잘 드는 가위처럼, 한 쌍으로 정확하기가 매서운 순간마저 더러 있답니다. 지극히 ‘표면’인 그림 속에서 무수한 층들을 발견해낼 때, 또 99퍼센트의 전략을 무너트리는 1퍼센트의 ‘우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형태는 다를지라도 저 나아간 데서 예술은 모두 만나는 것이라는 지고한 답을 새삼 떠올리게도 되고요.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며 하늘에서 내리고 땅으로 흘러도 모두는 마침내 한데 만나는 법. 그곳을 바다라고 했던가요. 넓이로도 깊이로도, 우리가 읽는 책이 ‘넌지시’, 꼭 바다 같은 넉넉 품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싶네요.

  오늘 우수엔 정말로 비가 왔어요. 눈 대신 서리 대신 촉촉 내리는 봄비, 흔히 싹을 틔우고 순을 돋우는 단비라 하지요. 이즈음 나무들엔 겨울눈이 생겨요. 단단한 눈비늘 속에 솜털로 온기를 품고, 머잖아 잎으로 자라날 싹을 감싸둔 일종의 봉오리랍니다.

 

  이름부터 ‘겨울’눈이지만 요 우수 무렵에야 하나둘 생겨난다는 점이 재미있지요. 다가올 봄을 기다리며 겨울이 틔운 싹이라는 의미이려나요? 여기에 마침 시의적절 시리즈 3월 책의 제목이 『이듬해 봄』인지라, 또 소소한 우연의 재미를 더해보아요.

 

  예고한 대로 시의적절 3월의 주자는 신이인 시인이에요. 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지난해 『검은 머리 짐승 사전』(민음사)을 선보였으니 새싹만큼이나 푸릇푸릇(?)하달까요, 이 봄에 딱이다 싶게 기운 넘치는 목소리를 만날 수 있답니다. 상큼, 발랄, 씩씩, 명랑… 여러 형용사를 대어보았는데요, 더도 말고 딱 하나만 남기라 하면 ‘상쾌’ 어떨까 싶어요. 겉치레 없지만 뒤끝도 없는 글, 내색만큼 속셈 역시 없는 글.

  내향인들의 완고한 문을 포기도 모르고 두드려 마침내 납치에 성공하는 사람, 누가 삶에 똥을 던지고 가도 거름이다, 고마워, 답해버리는 진짜 ‘대가리 꽃밭’인 사람, 귀 청소 도구 풀 세트를 갖추고 있으며 남의 귀 청소해주기라는 수상한 취미를 가진 사람, 학창시절 기필코 동물사랑상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왜인지 윤동주상을 받고는 시인이 되어버린 사람…

 

  나열하고 보니 책 속의 기행(?)만 추린 것 같은데요, 실은 시인의 말대로, 이것이 누군가에겐 사소하고 평이한 일상이기도 한 거지요. 한 꺼풀 벗겨내면 누구나의 일상 저마다로 독특한 법이니까요. 초록 잎 위에 물 한 방울 같은 투명함, 신이인의 시인의 제일 매력이겠구나 합니다.

 

  간만에 쿡쿡 웃으며 따라 읽기에 딱인 책이지만, 그렇다고 동동 떠 있는 가벼움만은 아니다 싶어요. 투명함이 때로는 가장 무서운 법, 치장 없는 진심의 무게가 가장 묵직하기도 한 거지요. 한 번도 어긋난 적 없는, 어긋남이 무엇인지 모르는 돌직구의 낙천과는 다른, “어긋났기 때문에 가능한” 변화구의 낙천.

  일곱 해 동안 신춘문예에 낙방하면서 생각하기를, “누가 봐도 겨울의 정중앙인 때에 뻔뻔하게 봄 타령을 하다니”. 그건 그렇지, 좀 이상하긴 하지요. 그래서 “시인이 되고 싶다고 하면 농담하는 줄 아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이듬해만 기다립니다. 그러다보면 “그럭저럭 진짜 봄이 오게 되어 있”으니까요.

 

  신이인의 ‘진짜 봄’을 기다려봅니다. 이듬해도 아닌 올봄이니까요, 금방일 테지요. 시의적절 3월 『이듬해 봄』은 2월 말 만나실 수 있어요.

  일본 만화 중 『목소리의 형태』라는 작품이 있어요. 초등학교 6학년 쇼야의 학급에 청각장애를 가진 쇼코가 전학을 오게 되면서 겪게 되는 오해와 갈등 그리고 우정과 화해를 다룬 작품인데, 판타지나 액션 같은 소위 ‘장르물’이 아님에도 작품성과 대중성 양쪽 모두에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특히 장애와 왕따(이지메)라는 다소 민감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대중적인 공감과 폭넓은 사랑을 끌어냈다는 점이 호평을 받았답니다. 작품 곳곳에 녹아 있는 디테일들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인데요, 가령 제목 ‘聲の形’에는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신체자 ‘声’ 대신 정체자 ‘聲’를 사용했어요. 소리声, 귀耳, 손殳으로 이루어진 이 한자를 통해 ‘마음을 전하는 방법은 목소리뿐만이 아니다’라는 주제를 담고 싶었다고 해요.

 

  그리고 또하나. 배경은 일본의 오가키大垣시를 모델로 하고 있는데요, 하필 한자를 직역하면 커다란大 담垣이 되는 바람에 소통을 주제로 한 이야기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에서 ‘스이몬水門’이라는 가상의 이름을 붙였다고 해요. 물水과 문門이라니, 우수의 소문난다와 딱이구나 싶지요(?).

 

  농담이지만 아주 농담만은 아닌 게요, 이런 1퍼센트의 우연이 만들어내는 만남이 때로는 전부가 되기도 하는 것이 문학이고 책이기도 할 테니까요. 온 마음 다했다면 99퍼센트의 글, 1퍼센트의 우연 더해 우리로 만난 것이겠지요.

  “99퍼센트가 계획적이지만 1퍼센트의 우연에 의해 모든 것이 달라지는, 우연이란 것도 잠재적인 게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니, 우연에 일부러 올라탈 일은 없는 거죠. 하지만 예기치 않은 게 나오고 거기서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건 분명해요. 많은 실수에서 예기치 않은 낯섦이 나오고, 거기서 시작의 실마리가 풀리고, 저지르는 건 실수를 담보로 하니까요. (…) 나는 삶과 예술에 대해 생각할 때 천재를 뭐 그렇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20대에 천재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 천재보다 예술을 생활화하는 편이에요. A에서 B로 바뀌는 걸 개종이나 부정적으로 보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이상이죠. 바뀐다는 건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은 거니까요. 지금 하는 걸 버리지 않고는 옮겨갈 수 없잖아요. 내가 이렇게 해서 인정을 못 받나 해서, 운이 없어서 바꿀 수도 있어요. 어떻든 끊임없이 부정하고 바꾸고, 자기란 게 정해진 게 어디 있겠어요. 의문, 질문, 호기심이 있다면 머물러 있을 수 없어요. 인생이 변하고 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