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춘분春分입니다. 열두 시간의 낮, 열두 시간의 밤. 앞으로 추분秋分까지는 하루 중 낮이 더 긴 날들이 계속되지요. 그러해서 많은 지역에서 춘분을 길일이라 여기고요. 이집트, 켈트 등 태양력을 기본으로 하는 많은 고대 문화권에 춘분을 기념하는 의식이 존재했고, 페르시아력에선 아예 한 해의 시작을 춘분으로 삼는다지요.

  지난 소문난다에서도 한 해의 시작이 어찌하여 1월 1일 겨울 한가운데인가 고민해본 바 있으니, 날도 완연한 봄, 이맘때의 춘분을 시작으로 삼았던 이들의 마음 쉬이 수긍이 됩니다. 여러모로 3월, 새것으로 가득하여 사방이 기지개 켜는 달인 것을요.

  낮과 밤이 딱 반반인 날. 절반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가 있지요. “물이 반이나 남았네” 그리고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 둘 중에선 “물이 반이나 남았네” 할 줄 알아야 한다, 부정 대신 긍정의 힘을 강조하며 자주 쓰이는 비유이고요. 그런데 사실 중요한 물음은 지금이 딱 절반인가 아닌가, 물론 아닐 테고요, 다만 다음으로 향하는 우리 걸음의 모양새 아니겠나 싶어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할 시간이 “반이나 남았다”면 우리는 절반의 시간 느린 걸음으로 꼭꼭 채울 테고, 태산 같던 할일이 “반밖에 안 남았다”면 날랜 걸음으로 가뿐히 지나기도 하겠습니다.

  어떤 시작이라는 춘분, “시작이 반”이라 했으니 마음먹기로 반이나 왔고요, 갈길은 이제 반밖에 안 남은 때네요. 긴 밤도 더 긴 겨울도 오는 것이 우리의 계절, 이 절반의 날 춘분은 반환점으로 알맞을 테지요. 돌고 도는 계절이지만 우리 지나온 자리는 동그라니 나이테로 남는 법이라서요. 반환점에서 목 한번 축이고 숨 한번 고르고, 반이나 남은 미래로, 반밖에 안 남은 여정으로 다시 달려봅니다.

  사실 춘분의 낮과 밤도 엄밀히 말하면 꼭 같은 길이가 아니라고 해요. 낮의 길이를 태양 고도가 0도 이상이 되었다가 다시 0도 이하로 떨어지기까지의 시간이라 한다면 딱 12시간이 맞는데요, 사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일출과 일몰 지점에선 태양 고도가 약 –0.8도로 더 낮기 때문에, 기상학에서 말하는 ‘낮’의 길이는 밤보다 길다고 합니다. (16분 정도!)

  그러니까 봄을 돌아보는 오늘, 반환점 이미 돌아온 우리네요. 창밖에는 눈부신 날들 있겠지요.

  춘분을 서양에서는 equinox라 부릅니다. 그 어원을 살펴보면 동일한equi 밤nox, 곧 낮과 동일하게 양분된 밤이겠지요. 이름에 봄이 들어가는 '춘분'과는 다르게(춘분의 쌍둥이 '추분'에는 가을이 들어가죠) 서양 문화권에서 주목하는 것은 밤의 움직임 그 자체인 듯합니다.

  어쩌면 이 equinox에 대해서 '우리는 동일한 밤을 가졌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녹스nox는 그리스신화에서 카오스의 딸이자 하늘과 낮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니 밤이 낮에 선행하고, 질서 이전에 혼돈이 있었으며, 탄생 이전에도 어떤 삶이 머물렀습니다. 하루가 지고, 우리가 잠이 들면 어둠 속에서도 꿈은 계속되듯 모두에게는 동일한 밤이 찾아옵니다.

  이 밤을 지배하는 것은 어두움, 검은 것들입니다. "검은색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줄을 긋고, 휘갈기면" 검어집니다. 다시, "검어진다는 것은 가시적인 형태가 없어진다는 것" "부재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밤은 "죽은 자" "귀환이 불가능한 자"꙳꙳들의 세계인 것이겠죠.

  바야흐로 춘분, 오늘을 기점으로 이 비가시적인 세계는 조금씩 줄어들겠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책 『어두운 목소리』는 이 세계로부터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이야기합니다.

  이때 저자는 목소리, 특히 녹음된 목소리의 존재 방식에 주목합니다. 그에게 이 목소리는 "영원토록 현재에 머물도록 운명"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변질되기 쉽고 또 이미 사라진 것들에 지나치게 억류되어 있는 다른 감각과 달리 목소리는 울려퍼지는 순간만큼은 언제나 이 순간에, 떠나간 이들과 함께 존재합니다. "목소리는 일종의 연옥과 같은 곳, 말하자면 대기실 같은 공간에서 머무르다가 불쑥 솟아오른다. 목소리에게는 주파해야 할 거리가 있지 않다. 목소리는, 목소리 그 자체로서 현재에 존재한다."

   『어두운 목소리』는 목소리라는 "매장할 수 없는 유일한 신체의 일부"에 대한 단상을 펼치는 글입니다. 프랑스에서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인 저자가 간결한 프랑스어로 쓴 독특한 책이기도 하고요. 마지막으로 한 문장, 혹은 두 문장, 그렇게 문단 사이에 여백을 두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글이 그 자체로 어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그 파동을 닮은 것 같은 글입니다.

Ryoko Sekiguchi, La voix sombre, P.O.L, 2015.  

  매달 매일을 생각하며 써내려가는 것이 시의적절 시리즈이니, 양안다 시인의 4월 두고서도 여러 날들이 떠오르지요. 하루만큼은 작은 거짓말도 용서받는 만우절, 나무 대신 마음을 심어도 좋을 식목일, 그리고 무엇보다 잊히지 않을, 4월 16일. 『달걀은 닭의 미래』 속 4월 16일 꼭지의 제목 또한 「4월 16일」입니다. 표지의 색을 달리 떠올릴 수 없었던 연유이기도 하고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요
내가 이해한 바로는
호수에서 춤을 추지 않고
호수에서 잠들지 않고
호수에서 수영하지 않습니다
호수에서 사랑뿐
우리의 산책에는 저녁이 없고 낮과 밤이 유일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등지고 잘도 잠든다
희망과 절망을 반으로 조각내겠습니다 문을 온전히 열어두지 말아요
세상의 절반 사랑하기
인간의 절반 증오하기
조금 열린 채로 조금 닫힌 채로

  절반이고 가운데, 반환점 춘분을 이렇게 지나갑니다. 오늘 소문난다의 문 슬쩍 닫으면서, 난다의 책 두 권을 떠올렸어요. 여전히 도처에서, 그림, 노래, 책, 건축물, 영화, 시로 끊임없이 태어나는 사람들(박연준·장석주, 『계속 태어나는 당신에게』). 그리고 걸어가면서行 또한 쌓여가는聯 시, 혹은 인생(신형철, 『인생의 역사』).

 

  봄에는 난다도 자주 산책을 나서려 해요. 걸음 계속하는 동안 읽음으로 쌓는 일 함께해주시면 그 걸음 가볍기만 할 테지요.

청명淸明에 돌아올게요. 또 만나요 🤗

  ‘시’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대단한 예술이다. 시는 행行과 연聯으로 이루어진다. 걸어갈 행, 이어질 연. 글자들이 옆으로 걸어가면서行 아래로 쌓여가는聯 일이 뭐 그리 대단할 게 있겠는가. 그런데 나는 인생의 육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고 믿고 있다. 걸어가면서 쌓여가는 건 인생이기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생도 행과 연으로 이루어지니까.

• 3월에도, 시의적절 보름 챌린지 🌕
  신이인 시인의 3월 이야기 『이듬해 봄』
  하루 한 편씩 보름간 함께 읽어요!
  참여하신 분들 중 추첨을 통해
  신이인 작가가 직접 짠 털실 개구리 ‘해봄이’를 선물로 드립니다.
  👉 챌린지 안내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