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의미마저 청명한 봄의 다섯번째 절기 청명淸明입니다. 오늘은 날씨가 아주 맑았으니 절기가 이름값을 하는 날이네요. 그렇게 청명을 지나 바로 내일이면 차가운 음식을 나눠먹고 성묘와 이장을 하는 명절인 한식寒食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통 한식은 청명 당일이나 다음날인데요. 거의 동시에 찾아오는 두 날에 빗대어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같다'라는 뜬금없이 무시무시한 속담도 전해져 내려오네요.

  청명 혹은 한식에는 차가운 음식을 먹는다고 말씀드렸었지요. 전통적으로 이날 불을 쓰는 것을 금하기 때문인데요. 정말 이상한 것은 이 한식에 대궐에서 불을 피워 각 관청으로 나눠주면 각 관청이 다시 백성들에게 전하는 불 나눔 풍습도 있었다고 합니다. 불을 다 끄라 하고, 동시에 불을 피워주고… 도대체 왜?

  예로부터 오래된 불씨는 양기와 불길이 지나쳐서 전염성 열병을 만들어낸다고 믿었다고 해요. 하여 주기적으로 오래된 불을 끄고 새로운 불을 피웠다는데, 한식과 청명이 이 '구화舊火의 소멸과 신화新火의 점화 사이 과도기적 시간'이라는 것이죠(그러고 보면 한식을 '손 없는 날'이라 하여 이때 이장을 하는 풍습도 이해가 갑니다. 불을 껐으니 혼도 잠시 쉬어가겠죠). 

  청명과 한식, 이 겹친 시간을 공간으로 상상해보자면 날카로운 꼭짓점처럼 뾰족해서 어느 방향으로든 넘어질 수 있는 산봉우리, 차도와 인도 사이 애매한 회색 지대 같은 것이 떠오릅니다. 그러니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매한가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은 그대로 죽고 어떤 것은 그럼에도 다시 태어나는 날, 청명이자 한식이니까요.

  세 개의 밤이 있습니다.

  먼저 수태되었으나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은, 어린아이의 온전하고도 완전한 자궁 속 밤이 있습니다.

  태어난 후엔 매일 뜨고 지는 해의 움직임과 함께 나타나는 지상의 밤이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죽음 이후, 육체와 영혼 그 모든 것이 빠져드는 어둠으로서 밤, 지옥의 밤이 있습니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는 우리 삶을 선행하고 지배하는 이 밤과 침묵에 천착합니다. 사실상 키냐르의 모든 글이 언젠가 있었던 (또 언젠가 있을) 이 어두운 밤을 포착하려는 시도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작가는 이 밤에 자신이 도달할 수 없다는 걸 압니다. 우리가 수태되었던 밤, 우리는 그곳에 있지 않았으니까요. 우리보다 앞서 있는 날을 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 밤의 중심에는 단연 에로티시즘이 있습니다. 이 최초의 밤을 이루는 것은 두 남녀의 만남이었을 테니까요. 밤을 닮은 책 『성적인 밤』에서 키냐르는 성姓과 밤, 그 꺼지지 않는 허기와 욕망의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제가 이 책의 원서를 발견한 것은 도서관이었습니다. 자주 둘러보는 서가가 아니었기에 이 만남은 우연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겠습니다.

  책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빨려들어갔습니다. 이 끌림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여전합니다. 이 끌림을 유발한 것들에는 독특한 판형의 장정, 마치 어둠 속에서 서서히 나타나는 환영처럼 검은 배경의 종이 위를 수놓는 도판, 들끓는 이미지와 글의 부딪침 등 서서히 짚을 수 있게 된 요인들이 있고요, 또한 여전히 알 수 없는 이유가 있겠습니다.

  이 책에는 총 193점의 도판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피카소, 호퍼부터 신윤복, 우타마로, 석도까지 동서를 가로지르고 고금을 관통하는 이 그림들을 묶는 것은 에로티시즘과 밤이라는 테마입니다. 그리고 이 거침없는 그림들 곁에서, 때로는 그림으로부터 벗어나며 키냐르의 글이 유영하듯 이어집니다.

  작가는 “이 그림들을 수집하면서 결코 지치지 않는 기쁨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원서를 발견한 뒤 출간을 준비하고 편집까지 1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저 역시 이 공포스러우면서도 황홀한 책이 주는 기쁨을 만끽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금 이르게 소개했지만 곧 이뤄질 만남, 『성적인 밤』입니다.

  맑고淸 밝음明이라는 뜻의 청명. 날씨를 두고 ‘청명하다’할 때의 청명 또한 같은 뜻이지요. 그런데 사전에서 청명을 찾아보면 전혀 다른 한자를 쓰는 ‘청명靑冥’이 있습니다. 뜻풀이는 “푸른 하늘”로, 언뜻 청명하다의 어근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요, 푸를 청靑 뒤의 한자가 어두울 명冥인 것을 알게 되면 어라? 싶기도 하지요.

 

  어두울 명冥은 지하세계를 뜻하는 명계冥界, 명계의 신 플루토에서 따온 명왕성冥王星, 고인을 축원할 때 비는 명복冥福 등에 쓰이는 한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한자 안에 ‘하늘’이라는 뜻이 있다고 해요. 푸른 하늘을 뜻하는 청명靑冥이 바로 그 예이고요. 어두움과 하늘, 한없이 멀어 일말도 무관해 보이는 두 단어가 어떻게 같은 뿌리를 대게 된 것일까요.

 

  옥편이나 한자사전에서 ‘冥’을 찾아보면 ‘하늘’이란 뜻 바로 아래에 ‘바다’가 있습니다. 예시로는 북쪽 바다를 가리키는 북명北冥이 있고요. 하늘에 이어 바다라니 웬걸, 의문만 더해갈 때 바로 위의 또다른 뜻을 만나게 됩니다. 일곱번째 뜻 ‘깊숙하다’. 생각해보면 그렇지요. 밝은 하늘과 맑은 바다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우리는 캄캄한 하늘 깜깜한 바다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끝 간 데’를 알 수 없는 밤과 하늘과 바다, 어둠冥 속에 잠긴 파랑靑을요.

 

  문득 요 며칠의 일상을 (머릿속에서) 함께했던 문장을 떠올렸어요. “언젠가는 산 채로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멋진 무용담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본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연숙(리타) 작가의 『여기서는 여기서만 가능한』 속 구절이지요. 어째서 이런 문장이었을까요. 어둠 속에서 제 발로 걸어나온 이가 마침내 마주할 것이 푸른 하늘靑冥이라서일까요. 혹은 그 멋진 무용담이 곧 “가장 어둡고 축축하고 낮은 곳”의 깊은 어둠靑冥에 기대 있기 때문이려나요.

  예술가, 여성, 퀴어, 가난, 섹슈얼리티, 글쓰기… 닉네임 리타, 비평가 이연숙의 키워드들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살아 있다”는 것. “어제 죽은 사람들이 머물다 간 장소”에서 망가지고 부패한 자신을 끌어안은 채 천천히 익사하는 감각. 다만 거기서 그는 ‘씁니다’. “희망 없이 대가 없이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또 파괴하는 일”, 바로 일기를 말이지요. 그러니까 깊이 잠긴 ‘여기’에서 “여기서만 가능한 장면들”을 기록하며 오래 참은 숨을 조금씩 틔우는 일.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지요. “나는 살기 위해서 일기를 썼다. 일기가 나를 살렸다.”

 

  그러고 보면 푸를 청靑 안에는 청년靑年, 청춘靑春처럼 ‘젊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여기서만 가능한』 속에도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이연숙 작가의 시간들이 있어요. “진창”이라 불리는 이십대, “바닥”의 다른 이름일 ‘여기’의 기록을 포함해서요. 푸름과 젊음靑이 곧 맑음淸과 밝음明일 수는 없는 거지요.

 

  일종의 밈meme으로 ‘지옥에서 돌아온’이라는 수사를 쓰곤 합니다. 지옥에서 돌아왔다니, 정확히 무슨 뜻이라고 설명은 못하더라도 아무튼 한층 단단하고 훨씬 강해진 모습의 귀환임은 분명한데요, 그러니 젊음靑이라는 지옥冥을 걸어온 무용담 필시 ‘멋질’ 수밖에요. 온몸 가득 뚫린 창상創傷, 어쩌면 그것이 곧 솟아날 ‘구멍’이었는지도요.

  나는 망가지고 있고 부패하고 있다. 나는 내 친구들이 일찌감치 청산한 이십대 시절의 악습들을 끌어안고 익사하고 있다. 모두에게서 버려졌다고 느낀다. 혹은 내가 모두를 버렸다고 느낀다. 나는 내게서 풍기는 악취를 숨길 수 없어서 가장 어둡고 축축하고 낮은 곳에서만 기어다닌다. 여기서는 여기서만 가능한 장면들이 보여요. 나는 어제 죽은 사람들이 머물다 간 장소에 있어요. 언젠가는 산 채로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멋진 무용담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본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날씨가 좋은 날인 청명, 혹은 날씨가 좋은 날이어야 할 청명. 그래서 청명에 날씨가 좋으면 그해 농사가 잘 될 거라는 말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매 절기를 챙기다보면 이 'OO에 날씨가 좋으면 한 해가 길하다'라는 레퍼토리가 정말 끝도 없이 나오는 듯해요. 입춘에는 보리 뿌리 수로, 경칩에는 개구리 울음소리로, 춘분에는 첫 농사날의 성과로… 봄 절기뿐일까요, 찾아보면 1년 내내 절기는 사실상 미래를 점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당연히 맞지 않는 날도 있었겠지요. 뿌리 수가 하나인 입춘도, 침묵 그 자체인 경칩도, 농사일 그저 놀고 마는 춘분도 있겠죠. 그러니 사실 중요한 것은 절기 점占이 용한지 아닌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길운을 바라는, 그리하여 기어코 길운이 올 때까지 길운을 불러보는 마음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새로운 운세를 가지고서 다음 절기가 또 다가오니까요. 그럼, 

곡우穀雨에 돌아올게요. 또 만나요 🤗

• 『여기서는 여기서만 가능한』 미리보기 엿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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