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전

2024. 4. 19.

이 메일이 잘 보이지 않나요?

〰 스무번째 소문 〰
2024년 4월 19일 ∷ 곡우穀雨 ∷

👻 계절을 지나는 소문

비가 오기 전, 가장 푸릇한 순간

봄비를 알리는 곡우穀雨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곡식을 깨우는 비'죠. 경칩驚蟄에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깨어난 지 정확히 한 달 반 후, 이제는 비를 머금고 곡식이 일어날 준비를 합니다. 동물이 조금 더 빠르게, 식물은 동물의 부산스러운 소리가 쌓일 때 즈음 여지없이.

녹차는 차나무의 잎을 산화하지 않고 그대로 덖은 차를 말하는데요, 산화 정도나 발효 유무에 따라 같은 찻잎이 녹차, 백차, 홍차, 청차, 보이차가 됩니다. 그중에서도 녹차는 가장 푸릇푸릇한 찻잎의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죠.

이 녹차는 수확 시기에 따라 등급을 나눕니다. 그중에서도 이른 봄에 가장 먼저 따는 우전雨前을 으뜸으로 치는데요. 은은하고 순한 맛이 매력적인 우전은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비가 오기 전, 즉 곡우 5일 전에 딴 찻잎을 의미합니다.

차에 관해서라면 영화 <애프터 양>에 나오는 장면 하나가 떠오릅니다. 휴머노이드인 양이 왜 차를 좋아하는지 묻자 제이크는 자신은 차라는 '아이디어'가 좋다고 말합니다. 그는 차라는 '환상, 땅과 날씨와 어떤 삶의 방식에 연결되어 있다고 믿게 만드는 환상'이 좋다고도요. "숲속을 걷고 있다고 상상해봐. 낙엽은 땅에 막 떨어졌고, 비도 이제 그쳐 축축한 느낌이 남아 있지. 그 숲속을 걷는 느낌. 그 모든 것이 차 한잔에 있어."

계절의 흐름에 맞춰 시간을 보낼 때 유독 '살아 있다'는 느낌은 생생해지는 것 같습니다. 차 한잔이 그 감각을 일깨우는 것은 비가 곡식을 깨우듯 찻물이 내부로부터 우리를 깨우기 때문이겠지요. 녹차 중에서도 우전차가 으뜸인 것은 그 찻잎이 비를 맞지 않았기에, 찻물을 내려 입안에 머금을 때에야 비로소 나와 함께 깨어나기 때문이지 아닐까요.

에디터 권현승

🌱 참으로 시의적절한 소문

웃으면 봄이 와요

녹차, 하고선 또다른 영화 한 편을 떠올려봅니다. 이시이 카츠히토 감독의 영화 <녹차의 맛>인데요, 사실 제목만으로 어떤 깊고 고상한 맛을 기대한다면, 예상을 엎고 이 영화, 소위 병맛(?)에 더 가깝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주인공이자 중학생 소년 하지메의 이마 한가운데로 기차가 지나가지요. 그렇게 이마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리고요. 그런가 하면 여동생 사치코의 뒤에는 바로 자기 얼굴이, 말도 안 되게 커다란 모습으로 둥둥, 자신을 자꾸만 쫓아다닙니다. 사춘기 소녀의 비대한 자아랄까요. 아버지는 최면술사, 할아버지는 마임 배우… 어느 하나 평범한 구석 없는 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오프닝부터 가히 초현실적이라 할 장면에 반쯤은 충격, 반쯤은 호기심으로 영화를 종주하게 되는데요, 사실 이 파격적(?)인 연출에 비하자면 영화 내내 달리 대단한 사건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가족 모두 저마다의 슬픔과 저마다의 결여를 마주해 고군분투하지만, 그 '대단치 않은' 고민이란 결국 이렇게든 저렇게든 마무리되고, 한바탕 소나기 뒤엔 응당 무지개가 뜨지요. '대단히' 평화롭고도 희미한 일상 속으로요.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바, 이 영화의 제목은 "맹맹한 녹차의 맛이야말로 곧 인생의 맛이지 않겠는가" 하는 아이디어에서 나왔다고 해요. 밍숭맹숭하기만 한가 하면 떫고도 쓰고, 그 안에 또 싱그러움과 개운함과 구수함 혹은 따뜻함을 품고 있는 녹차의 맛.

이 대목에서 문득 그 '녹차의 맛'이라는 거, 어쩐지 '시의 맛'과 닮아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당연하지요. 시의 씨앗은 인생의 이랑과 고랑 사이 심기는 것, 인생의 맛이 곧 시의 맛이기도 할 테니까요.

길을 걷다가 한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웃으면 봄이 와요.” 메다꽂듯, 어깨를 얼어붙게 한 그 말로 인해 한동안 나는 제자리였다. 뒤돌아보니 아이가 환히 웃고 있었다. ‘복’을 잘못 발음해서 ‘봄’이라고 했다기에는 지나치게 한봄이었다. 봄의 정중앙을 겨냥하는 말이었다. 곳곳에 꽃이 피고 볕이 푸진 봄날이었다. 웃으면 봄이 온다니, 움츠러든 몸을 쫙 펴게 만드는 말이었다. 제자리여도 좋았다. 제자리라서, 그 말을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 이런 순간들을 일컬어 남몰래 ‘시앗’이라고 불러왔다. ‘시의 씨앗’을 줄여서 부르기 위해 혼자 만든 말이다. (…) 시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가 단어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다. ‘먹다’라는 단어에서 ‘겁먹다’를 떠올린 뒤 ‘마음먹다’를 연결할 수도 있고, ‘기대앉다’라는 단어를 통해 ‘기대다’와 ‘앉다’가 얼마나 편한 상태인지 환기할 수도 있다. ‘더덜없이’라는 단어를 이야기하며 더하거나 덜함이 없을 때 찾아오는 깔끔함을 맛보게 할 수도 있고, ‘햇덧’이라는 단어로 해가 더해주는 혜택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가만하다’와 ‘사뿐하다’를 둘 다 포함한 ‘가만사뿐’이라는 단어를 가만사뿐 발음해보는 즐거움도 시가 선사하는 즐거움이다.

─오은, 「시앗 찾기」, 『초록을 입고』, 224~226쪽.

시의적절 시리즈 5월의 주자는 바로 오은 시인이에요. 일상에서 그런 시의 씨앗, 그러니까 '시앗'을 발견하는 눈 밝기로는 둘도 없을 이름이지요. 거기에 시의 맛, '말맛'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이름이기도 하고요. 이번 책에서도 그 말의 맛 유감없이 여한 없이 발휘됨에요, 오은 시인만의 단어사전이다 하면 조금 아쉬움 남겠고, 그 사전 심어 푸릇푸릇 무럭무럭 울창하니 피워낸 숲이다 하면 좀 설명이 되는 듯도 합니다.

5월은 푸르지요. 아이들 우리들 모두 자라고요. 이참에 크게 한번 웃고 '봄을 불러봄!'도 좋겠습니다. 오은 시인의 5월 제목은 『초록을 입고』이고요, 다음주면 조금 이르게 성큼, 5월이 입고될 예정이에요. 초록을 출고(!)까지 일주일, 웃으면 한봄이 옵니다!

에디터 김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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