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으로 들어서는 날, 입하立夏입니다. 절기의 기원이 기원인지라 우리 기후에는 그 이름이 딱 맞지만은 않는단 이야기 자주 했건만, 요즘 날씨로 보면 이미 여름이래도 그럴 수 있겠다 싶지요. ‘아시아 기후 역사상 최악의 더위’라는 보고가 나오는 요즘… 제법, 아니 많이 더운 5월입니다.

  안희연 시인의 여름을 떠올려봅니다. 눈 시리도록 무성한 초록이 때로는 맹렬한 적의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여름. 하지만 시인의 다음 시집이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임을 생각하면 이 여름, 또 다르게 읽히기도 합니다.

  무더워서 무서운 여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청량’의 제철이기도 하지요. 맑고淸 서늘함凉, 우리말로는 ‘싱그러움’ 정도가 좋으려나요. 저는 청량한 여름 하면 포카리스웨트와(라라라라라랄라라 날 좋아한다면…♬) 그리스의 산토리니를 떠올리곤 했는데요, 최근 하나 더 추가된 바, 날씨만큼이나 (여러모로…) 핫한 뉴진스의 <Bubble Gum> 뮤직비디오가 되겠습니다.

  아무래도 ‘청량미’라 하면 교복이 자동 연상인 것 같아요. 송글송글 땀방울마저도 싱그러움으로 착각게 하는 젊음, 그런 생기 때문이겠지요. 흰 교복 셔츠, 바닷가를 달리는 자전거… ‘꼭 대만 청춘 영화 같다’고들 하는데요, 아닌 게 아니라 저 또한 여름의 청춘 하면 대번에 대만 영화부터 떠오르곤 합니다. 내친김에 오늘은 대만의 여름 영화 몇 편을 추천해볼까 싶어요.

  국내에 대만 영화(와 드라마)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아무래도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라거나 <나의 소녀시대> 같은 청춘 로맨스물이겠지요. ‘상친자’를 양산하며 국내 리메이크까지 이어진 <상견니>, ‘왕벌의 비행’ 탄주 신드롬(?)을 일으켰던 <말할 수 없는 비밀>도 있을 테고요.

  <남색대문>은 이 영화들의 원조격이랄까요, 대만 십대 청춘들의 그 시절 첫사랑을 다룬 영화입니다. <말할 수 없는 비밀> 계륜미의 데뷔작이기도 한데, 무심히 자른 숏컷에 중성적인 말투, 배우의 또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첫사랑, 삼각관계, 사랑과 우정 사이. 언뜻 전형적인 로맨스물처럼 보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자일까 여자일까, 아니 좋아해야 하는 것은’이라는 퀴어 서사가 겹쳐지며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후로 주인공들은 오래오래…’ 식의 낙관적 결말을 의심하는, 말하자면 해피엔딩 회의론자(!)인데요. 그런 까닭에 누가 누구와 맺어지는지, 이야기의 끝이 고백인지 포옹인지 결혼인지, 어쩌면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 영화의 엔딩을 참 좋아합니다. 들끓는 혼란의 여름, 그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 다만 사랑만은 아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모든 청춘 영화는 필연 성장 영화이기도 할 테고요.

  <영원한 여름>은 영화를 보기 전부터 제목만으로 이미 ‘반칙’ 같은 느낌이지요. 대만의 바닷가 시골마을에 사는 문제 학생 위샤우헝과 반대로 우등생이자 모범생 캉정싱, 두 남학생 사이엔 우정이라고만 하기에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데요, 여기에 혜성을 뜻하는 이름의 여학생 훼이지아가 전학을 오며 관계에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합니다. 사실상 주인공들의 삼각 구도는 <남색대문>과 거의 같은 셈이에요. 가끔 청량한 여름 영화라는 건 에어컨 빵빵한 실내에서 창밖 여름 풍경을 구경하는 일, 같은 일종의 판타지가 아닐까… 의심도 듭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여름>은 딱 그 반대일 테지요. 뜨겁던 여름, 눈물과 땀을 구분할 수 없도록 젖어버린 얼굴, 숨막히게 눅진한 공기의 계절을 떠올립니다.

  앞의 두 영화보다도 국내에 덜 알려진, 그러니까 ‘나만 아는’ 대만 영화를 선심 쓰듯 내어줄 기회가 있다면… <대아거원방> 어떨까 싶어요. 색맹으로 태어나 따돌림을 받는 여동생 아구이와 사랑이라 믿었던 남성들에게 번번이 상처를 받고 마는 오빠 아셴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소수자의 외로움과 희망에 관한 이야기가 되고요. 소품에 가까운 영화이지만, 이 작품 또한 그 엔딩 때문에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 있어요. 한바탕 비가 내리고, 색을 구별할 수 없는 아구이는 알록달록 색색의 우산을 펼쳐 햇볕 아래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지요. 거기 물론 무지개가 떠 있고요.

  어쩌다보니 대만 여름 영화 추천이라기보단 대만 퀴어 영화 추천이 되어버린 것 같은데요… 청춘이라는 여름의 바다. 뜨거운 볕을 식혀줄 바다이지만, 그곳에도 파도가 치고 격랑이 이는 법이니까요. 이 계절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여름이었다”, 그리움 담아 말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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