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이 가장 길어지는 순간, 하지夏至입니다. 한 해가, 원 혹은 타원의 모양으로 회귀하는 시간이 하나의 극점에 도달했다는 뜻이겠죠. 낮이 가장 길어지는 시기에 도달할 때면 저에게는 이때까지 조금씩, 슬그머니 영역을 늘려온 낮의 움직임이 그려집니다. 난다 사무실에서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은 서쪽으로 나 있는데요. 저녁 (대개) 같은 시간에 퇴근을 하지만 퇴근하러 밖으로 나가보면 해의 위치는 언제나 조금씩 달라져 있습니다. 어느 때는 여전히 한낮 같기도 하고요, 어느 때는 서쪽으로 지는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 걷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 건물을 나서기 전에 빛은 사라져 있을 때도 있고요.

  매일매일이 같지만, 또 다른 시간입니다.

  파스칼 키냐르는 시간에 대한 한 가지 역설을 제시하는데요(자꾸 키냐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모호에서 키냐르의 책이 나와서…라기보다는 그냥 제가 키냐르의 애독자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우리를 통과해 쌓이며 ‘과거’가 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쌓인 것들의 퇴적층은 두꺼워지겠죠. 그렇다면 시간이 지날 때마다 우리의 세계는 점점 더 ‘과거적’이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년 전보다, 백년 전이, 백년 전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욱 풍성한 과거에 쌓여 있습니다. 미래는 더욱 풍요로운 과거가 됩니다.

  가장 낮이 긴 이 하루는 그렇지 않았던 어떤 하루에서부터 시작된 모든 하루를 떠올리게 합니다. 마침 하지는 소문난다의 스물네번째 순간, 즉 소문난다가 만 일 년이 되는 순간입니다. 2023년 7월 7일에 시작한 소문난다의 한 해가 조금씩 채워지고 쌓여 2024년 가장 눈부신 순간에 일 년을 맞이하게 되었네요. 소문난다를 통해 매 절기를 챙기면서 사실 절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절기가 계절에 상응하는지 여부가 아니라 절기를 통해 순간순간을 챙기는 마음, 의식儀式을 통해 의미화되는 하루하루라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태양력을 기준으로 보면 한 해의 한가운데, 가장 찬란한 계절에 한번쯤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보는 것은 어떨까요?

  해가 길어진다니, 그만큼 여름의 복판이구나 생각하게 되지요. 66.5도 이상의 고위도 지방에서 하지는 곧 해가 지지 않는 밤, 백야白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끝나지 않는 낮이라니, 다시 한번 ‘영원한 여름’을 생각하게 되고요.

  시의적절 7월의 주자는 황인찬 시인이에요. 어쩐지 황인찬 시인의 시들을 생각하면 여름의 냄새가 떠오르곤 하지요. 그리하여 7월이 아닐 수 없고 아닐 리 없으니 역시 7월이어야 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여름의 냄새란 건 뭘까요? 달궈진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후덥지근한 수증기, 장마철 눅눅 젖은 빨래 냄새, 혹은 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불어오는 초록 잎 씻기는 냄새…

  하지만 역시 여름의 진정한 전형이라면, 학교 운동장을 가르는 축구공의 흙 냄새, 이마에 맺힌 땀방울 씻어내는 수돗가에서 물 번지는 냄새 같은 청춘의 것들 아니려나요. (아직도 <선재 업고 튀어>에서 못 빠져나온 것일 수 있으나…) 생각해보면 인생의 계절에서도 십대야말로 무성히 또 맹렬히 자라나는 여름과 꼭 닮아 있기 때문이겠지요.

  아닌 게 아니라 황인찬 시인의 7월 『잠시 작게 고백하는 사람』에도 ‘영원한 여름들’에 관한 글이 실려 있어요. 이 분야를 특히 즐겨 다루는 일본 서브컬처에 대한 소개와 함께요. <신세기 에반게리온> 그리고 <스즈미야 하루히> 중 ‘엔들리스 에이트endless 8’라는 에피소드입니다. ‘에바’ 시리즈의 배경이 재앙 이후 영원한 여름이 된 아포칼립스적 세계를 다룬다는 것은 익숙하실 테지만, ‘엔들리스 에이트’가 그리는 영원한 여름은 또다른 모습입니다.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의 주인공 하루히는 사실 이 세계의 기원이자 신 같은 존재인데요, 평범한 고등학생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세계 전체가 하루히의 상상, 하루히의 소망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물론 하루히 본인은 이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고요. ‘한 번도 친구들과 여름방학 숙제를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낀 하루히는 그만(?!) 무의식중에 영원히 여름을 반복시켜버립니다. 무려 일만오천 번(!) 이상 말이지요.

  황인찬 시인은 여기에서 ‘루프물’의 감각을 읽어냅니다. 일상을 거부하고 성장을 지연시키며 차라리 세계를 중단(파괴)해버리는 것. 친구들과의 시간이라는 어떤 소중한 기억을 위해 성장 자체를 영원히 유보시킨다는 이 이야기에는 어떤 슬픔과 퇴행성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여름이란 그런 것이다. 영원한 청춘이나 영원한 생명력이면서 성장 불가능의 세계이며 죽음의 세계인 것. 이 여름의 이미지에 영향을 짙게 받은 내게 여름이란 청춘이면서 파국을 품고 있는 것이고, 무한하고 영원한 것이면서 이미 끝나버린 무엇이기도 하다. 바글거리는 생명력과 속절없는 무력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고 해야 할까.

─본문 중에서

  머물고 싶은 순간, 멈추고 싶은 시간. 무심히도 계절은 흐르지만요, 그런 흘러감 없이 미래도 성장도 없을 테지요. 다시 백야를 생각해봅니다. 끝나지 않는 낮이란 신비한 풍경이지만, 그 또한 머지않아 기어이 밤이 올 것을 아는 우리의 기다림이기에 가능한 아름다움일 테지요.

* 시의적절 황인찬 시인의 7월 『잠시 작게 고백하는 사람』은 다음주에 만나보실 수 있어요.

서울국제도서전에서도 인사할 수 있답니다!

• 향으로, 공간으로 만나는 『성적인 밤』
  『성적인 밤』이 출간된지도 벌써 한 달 반, 잘 읽고 보고 계신가요? 수록된 도판 덕분에 시각적인 즐거움까지 함께하는 이 책, 이제는 다른 감각들도 함께합니다!
  
  사적인 독서를 즐길 수 있는 서재 센트 온 블랭크에서 '『성적인 밤』 특별전'이 열립니다. 김태형 조향사가 『성적인 밤』을 위해 특별히 조향한 향기가 가득한 공간에 앉아 천천히 책을 감상해보세요. 서재에는 여러분의 독서를 풍성하게 해드릴 다양한 작업물이 놓여 있습니다. 전시는 7월 5일부터 26일까지!
  
  전시와 더불어 류재화 번역가, 권현승 편집자와 함께 책을 이리저리 뜯어보는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키냐르, 성(性), 시각예술 등... 이 다양한 층위를 가진 책을 도대체 누가 읽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읽었을까, 궁금하시다면 함께해주세요!
  
  자세한 안내는 다가오는 일요일(6/23) 모호 인스타그램에서!
  👉🏻 모호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 같이 낭독합시다, 『사랑』 릴레이 낭독회
  소리 내어 읽을 때 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사랑』의 낭독회에 초대합니다. 낭독회가 처음이어도, 직접 낭독해보는 것이 어색하셔도 괜찮습니다. 문학살롱 초고의 은은한 조명 아래 칵테일 한잔과 함께라면!
  
  7월 4일(목) 저녁 7시 반, 문학살롱 초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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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만나요
  이번 서울국제도서전에는 난다가 독립 부스로 참여하지 않는 대신, 문학동네 부스에서 함께합니다. E17 문학동네 부스를 찾아주세요!
  6/26(수) 손웅정, 6/29(토) 황인찬 두 작가님의 사인회도 있을 예정이에요.
  난다 인스타그램에서 자세한 소식 전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