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문 밖은 가을, 부르면 불어올 가을

소문난다 여름방학 특집: 대문난다 (전욱진 시인 깜짝 방문)

2024. 8. 7.

이 메일이 잘 보이지 않나요?

〰 여름방학 특집: 대문난다 〰
2024년 8월 7일 ∷ 입추立秋 ∷

🌅 소문난다의 여름방학

찌지도 말고 지지도 말고

말도 안 되는 사실 한 가지, 오늘은 입추立秋랍니다. 물론 날씨로 봐서야 믿을 수 없는 일이라서요, 소문난다는 오늘까지 (아침 잠투정의 마음으로…) 여름방학의 와중이지만요. 절기의 이름들은 어찌하여 번번이 계절보다 먼저 오는지 모를 일이지만, 사실 입추의 다음에 처서가 있는 것부터가 그런 헤아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위가 그치지 않았어도 마음 먼저 가을로 보내두는 일. 바람 불어올 가을 휘휘 불러봅니다. 똑똑, 부르는 이 있음에 저희도 벌떡 일어날立 가을秋이네요.

그리하여 곧 소문난다로 돌아올게요. 찜통 같은 더위라 한들, 여러분 부디 찌지도 말고 지지도 말고, 익힘만큼 식힘으로, 금세 만나요!

📭 편지 대신 전해드립니다: 전욱진 시인

이제부터 가을

안녕하세요, 소문난다 구독자님. 저는 시를 쓰는 전욱진이라고 합니다. 대서를 지나 입추를 맞이해 대문난다로 인사드리게 됐습니다. 매일같이 전국에 폭염특보가 발효되고 있는 가운데 독자님께선 무사히 잘 계신가요?

‘TMI’로 운을 떼자면 저는 집에 에어컨도 없이 올여름을 나고 있습니다. 설치해야지 꼭 그래야지, 하고 다짐한 게 작년인데 미리부터 대비하지 않아 올해도 때를 놓치고 만 거예요. 에어컨 설치 기사님을 구하기가 요맘때 무척 어렵거든요. 지난여름도 요만치의 무더위로 힘들어했던 거 같은데 왜 이렇게 나는 잘도 꾸물대고 잘도 잊는 걸까요.

실은 지금 이 편지도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와중에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그런데 입추라니요, 세상이 가을에 들어섰다니요. 가히 헛소문 아닌가요. 낮이고 밤이고 숨이 턱 막히는 폭염 앞에 다들 녹아내리는 중이잖아요. 그런데도 세상이 가을에 들어섰다니요, 입추라니요. 가만 돌아보니 이맘때에 다다르는 이 절기가 늘 그랬던 거 같습니다. 더위가 채 가시지 않았는데 이제부터 가을, 이라는 말이 먼저 다가서는 때. 그렇게 하면 정말 가을을 나게 되는 걸까, 의구심을 품게 하는 무렵.

한편 옛사람들은 입추 즈음(음력 7월)을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 일컬었다고 해요. 바빴던 농사일이 끝나고 잠시 한가해지는 시점이었답니다. 어정어정 건들건들 그렇게 꾸물거리기는 제가 참 잘하는 일인데요. 이처럼 유유히 거닐다 세상보다 먼저 내가 가을로 건너가는 건 아닐까 생각도 해보고요. 그래서 어제는 땀을 뻘뻘 흘리며 걷다가 그만 너무 더워서 나무 그늘 안에 섰는데요. 옆엔 어쩐지 나와 비슷한 처지로 보이는 두 사람이 한창 여름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습니다. (음침하지만) 거기에 시가 있지는 않을까, 귀를 쫑긋 세우고 열기를 좀 식혔습니다. 그리고 저 나름의 시를 발견했어요.

입추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나 몰라

옛날엔 여름에 이렇게 안 더웠대

옆에서 듣던 난 하는 수 없이

옛날 여름 생각하다

옛날을 떠올리고

옛날 사람 생각하다

옛날 사람이 돼서

그늘을 나섰습니다

얼마 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북미 원주민에 관한 전시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을 관람했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그들은 다달이 변하는 세계의 모양을 인식했고, 이를 가지고서 그 달의 이름을 지었다 전해져요. 우리가 어정칠월이라 이르던 7월은 ‘열매가 빛을 넣어두는 달’(크릭족), 건들팔월이라 부르던 8월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하는 달’(쇼니족)이라 명명했답니다. 얘기를 듣고 나니, 다니는 회사 건물 앞 모과나무에 열린 열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 알 듯했습니다. 뜨거운 열기 아래 다른 건 다 잊고 다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바라는 건 요즘 나의 일이고요.

그러나 지금이 제아무리 ‘다른 모든 것을 잊게 하는 달’이어도 우리에겐 분명 잊히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저로 말할 거 같으면, 옛날 어느 저녁 섬의 들판을 지나던 말 한 마리를 잊을 수가 없어요. 벌새를 처음으로 보았던 날도 곧잘 기억합니다. 흐린 날 놀러갔던 바닷가도 자꾸 생각나고요. 그 무렵 내가 많이 좋아했던 사람의 옆모습도 그렇습니다. 옛날 일을 잊지 않는 사람은 그 일을 떠올릴 때만은 분명 옛날 사람이겠죠. 그렇게 옛날 사람인 채로 오늘날의 거리를 거닐기도 할 거고요(그러다 어제의 저처럼 땀 한 바가지 흘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살그머니 다가와 이제부터 가을, 이라고 하면 정말 가을을 나게 되는 걸까. 의심스럽지만 한편으로 이는 조만간 새 시절이 올 테니 희망을 갖고 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새 시절. 그때는 기분 좋은 바람이 불고 차가운 아메리카노보다 따뜻한 라떼가 더 맛있게 느껴지는 때일 겁니다. 그동안은 몸도 마음도 한가해서 지난봄에 계획했던 일을 다시 살펴볼 수 있고요. 그 가운데 이룬 일과 이루지 못한 일, 등지고 선 두 개의 사실을 확인한 다음 둘을 차차 화해시켜도 좋겠죠. 말이 먼저 있은 다음 세계가 빚어졌다던 어느 신화와 같이, 그런 일은 오롯한 나의 권능이니 말입니다.

이제부터 가을, 이라고 하니 머릿속으로 그려봅니다. 곧 있으면 아침마다 흰 이슬이 맺히고 색바람이 불어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겠네요. 나뭇잎엔 단풍이 물들다 점차 떨어져서 밟아보면 재밌는 소리가 날 거고요. 그렇게 밤의 길이가 조금씩 길어지고 얼마 안 가 세상은 제법 쓸쓸해 보일 테죠. 그때는 자꾸만 힘에 부치던 이 여름이 하나의 정경으로 남아 우리는 겨울철 내내 그걸 아껴서 꺼내보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전에 그러니까 여름과 겨울 사이 짧은 겨를, 모과나무 열매가 떨어질 때쯤 우린 늘 그랬듯 새 시절 앞에 잠시 멈칫하고 있을 거예요. 코스모스 군락이 원래 저기 있었던가 아 구절초가 이맘때 피었지, 하며 그 예쁨에 새삼 감동하면서. 잘도 잊고 잘도 꾸물대는 저는 그리하여 다시금 놀라워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로서 입동立冬에 이르기까지가 가을입니다. 독자님께서도 슬슬 채비를 시작하시고 그동안엔 무작정 아름다우시길. 그럼 이만 줄입니다.

전욱진 드림

✉ 다시 거머쥐는 편지

표면장력의 마음

소문난다의 독자이자 대문난다의 객원 에디터, 현구님의 편지를 대신 전해요. 억수로 쏟아지곤 하는 여름, 범람하는 마음 꼭 쥐어볼 여름이기도 하지요. 우리 모두 무탈하기를!

모든 관계의 출발선에서 나아가기를 망설였다. 타인과 덩어리지지 못하는 모래알 같은 삶이 행복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불행하진 않다는 타성에 젖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올해 여름은 그럴듯한 저항 한번 없이 사랑을 시작했다. 이번 연애만큼은 넉넉하게 사랑하고 주어진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 그러나 쏟아부었던 마음은 결국 범람했다. 상대방의 용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채우기 바빴다. 애정과 소유를 혼동했고 의도와 다르게 엇나가는 관계는 이전과 같은 마음을 증발시켰다. 결국 계절 하나를 넘지 못하고 결별했다.

유난히 하늘이 높았던 평일, 거리를 걷다가 더위에 지쳐 벤치에 앉았다. 문득, 그늘의 쓰임이 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겨울이 길어 여름이 오지 않을 줄만 알았다. 그러나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완전히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딘가에 남아 있었던 계절의 관성에 의해 하나둘 온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거리를 걷다가 빈번히 멈춰섰다. 사랑은 사라지고 여름만이 남았다. 계절은 순환됐다. 게워낸 사랑의 빈자리를 등지고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낮의 시간을 살아내고 집에 들어와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자정과 멀지 않은 밤에 배개의 눅눅함에 놀라 잠에서 깼고 조금 더 울었다. 가랑비에도 사람은 젖었다. 베개는 축축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슬픔을 가늠할 수 없어서 다시 잠을 청했다. 퉁퉁 부운 아침은 매번 슬펐고 매번 울었다. 충분히 울지 못하고 쟁여둔 눈물이 쏟아졌다.

어쩌면 나에게 이번 여름은 모순된 계절로 기억될 것이다. 밤의 시간보다 낮의 시간이 길어졌음에도 나에겐 밤이 한없이 길었다. 바깥과 단절된 작은 원룸은 항상 어두웠고 어제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용기를 얻은 것은 작은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온 타-닥, 타-닥 소리였다. 집 앞 오래된 건물의 금속 지붕에 비가 내리쳤다. 침대에서 일어나 비를 구경하는 것이 하루의 가장 큰 위안이었다. 떨어지고 부서지는 순간을 끌어안고 살아낸 하루들이 여럿 모였다. 삶의 행간 사이로 언뜻 무탈함이 튀어나왔다. 그와 보낸 시간에도 아름다운 순간이 있었다고, 그거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잠깐 괜찮았고 자주 괜찮지 않아서 어떤 맺음에도 도착하지 못했다.

‘새로 맞이한 계절에서 헌 계절을 돌이켜보면’,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실은 오랫동안 습한 여름의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마음은 언제나 범람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저 최대한 조심스럽게 총량을 살피며 가두는 수밖에 없다. 감정들은 예상한 것보다 거대하게 다가왔다. 가지고 있는 악력 이상의 에너지로 쏟아지지 않도록 붙잡아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또다시, 계속해서 버티지 못하고 범람하는 광경을 목격할 것이다. 그래도 다시 거머쥐어본다. 총량 너머의 마음까지 붙잡아두는 표면장력의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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