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여전히 가고 있고… 진즉에 갔어야만 했지만 아직 가진 않았네요. '처서매직'과 함께 여름방학이 끝나면 짠, 하고 돌아오려고 했는데 아직 남아 있는 무더위와 함께 돌아와버렸습니다.

  여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요. 사실 그런 말이 있는 건 아니고요, 이유를 적당히 갖다붙이기만 하면 사계절이 모두 독서의 계절 아니겠나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저는 올해 여름은 독서의 계절이다 하고 혼자 마음먹었고요. 날이 너무 더우니 어디 가고 싶은 생각도 없어져서 휴가를 쓰고는 그냥 본가에 머물면서 평소 읽고 싶던 책이나 잔뜩 읽었습니다. 덕분에 휴가는 끝났지만 읽는 모터는 속도가 어느 정도 유지가 되어 이런저런 책을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이번 여름에 읽었던/읽고 있는 책 중 몇 가지를 손에 꼽아보자면요.

    『밀란 쿤데라: “글을 쓰다니, 참 희한한 생각이네!”』(플로랑스 누아빌, 김병욱 옮김, 뮤진트리)

    『안녕, 에리』(후지모토 타츠키, 학산문화사)

    『하자르 사전』(밀로라드 파비치, 신현철 옮김, 열린책들)

    『망자들』(크리스티안 크라흐트, 김태환 옮김, 을유문화사)

    『질문의 책』(에드몽 자베스, 이주환 옮김, 한길사)

  정도가 있겠습니다.

  재밌는 건 돌이켜보니 올여름 읽었던 책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은 이미 그전에 읽었던 것이거나, 사놓고 안 읽었던 책이거나, 읽으려고 시도는 했으나 중간에 집중력을 잃고 놔두었던 책이라는 겁니다. 이런 발견은 일단 흥미로운 책은 사놓고 보는 버릇을 정당화하기 좋은 것이지요. 책을 사는 행위와 읽는 행위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라고들 하지만 어쨌든 가지고 있다보면 어느 날 이유 없이(혹은 알 수 없는 신비한 이유로) 눈에 띄는 책이 있기 마련입니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로 시작되는 노래의 다음 소절은 “남은 건 볼품없지만”입니다. ‘처서’라는 단어를 풀어보면 그 안에는 더위가 기세를 누그러트리고 멈춰 서면 우리는 더위를 뒤에 ‘남겨두고’ 가을을 향해 떠나는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원래 무언가가 지난 후 돌아보면 한창 그 순간을 돌파했을 때보다 볼품없어 보이는 법입니다. 유독 뜨거웠던 여름도 겨울 즈음에는 희미한 기억으로 남을 테고요. 하지만 언젠가 사뒀던 책이 계절을 몇 바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눈에 띄고, 오래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었을 때 어떤 책보다 새롭게 느껴지는 것처럼 어떤 ‘볼품없는 것’은 계속 남아 함께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 잔나비 -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여러분도 어찌, 여름휴가들 다녀오셨으려나요. 혹은 늦여름 휴가가 여전 기다리고 있으려나요. 우리 일상에 쉼이 있고 없고 간에, 시간만큼은 조용히 착실히, 그리하여 쉼없이 흐르지요. 시의적절의 시계 또한 그러해서, 꼭 사계가 그러하듯, 조용히 8월 여름 지나 9월 가을을 향하고 있습니다.

  여름은 슬픔처럼 살며시 사라진다고, 에밀리 디킨슨은 썼다.
  분명 다른 계절이 끝나갈 때와는 다르지. 왜 여름은 유독 사라지는지. 증발하고 휘발하는지. 기체인지. 움켜쥘 수 없는 무엇인지. 하는 수 없는 사랑 같은지.
  여름처럼 슬픔도 사라지려나.
  슬픔도 그치려나.

─8월 22일 「그치다」 부분,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안녕하세요, 여러분. 어느덧 처서입니다. 이맘때면 더위가 그치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한다고 하지요. 무덥게 내리쬐던 햇빛을 더는 안 봐도 된다는 사실이 기쁘다가도, 못내 섭섭하기도 합니다. 비 오는 날마다 쨍한 색으로 눈을 어지럽히던 초록색도, 매미 울음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아침을 맞이할 날도 지나간다는 건 벌써 애틋해지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우린 여름 끝자락을 붙잡고 길게 늘어지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 더위에 짜증을 냈었냐는 듯이.

  가을의 첫발을 내딛는 시기가 되면 언제나 엄마가 생각납니다. 막 슬픈 사연이 있는 건 아니고요. 저는 가을을 무척 좋아했지만(가을에 태어나지 않아 속상해할 정도로), 엄마는 가을을 좋아하지 않으셨거든요. 이유를 물으면 ‘늙는다’를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계절 같다고 하셨습니다. 말라비틀어진 잎이 떨어지고 휑한 나뭇가지만 남을 겨울을 기다리는 게 뭐가 좋으냐고 말이죠. 유난히 인상 깊던 그 대답을 들은 건 아마 초등학교 때였을 겁니다.

  그러던 작년 처서 무렵. 우리는 종종 어린아이를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어리광 부리고 싶어지는 순간이 생기곤 하지요. 당시 저는 성인을 코앞에 두던 나이였음에도 철없게 발톱을 깎아달라 말했고, 엄마는 웃으며 “그럴까?” 하며 받아주었습니다. 엄마의 옆구리에 끼어 있는 저의 다리, 늘 차갑던 손발을 감싸는 부드럽고 따뜻한 손, 발가락 하나하나를 잡아주던 손가락과 메트로놈 소리 같던 손톱 깎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생경하던지. 바닥에 大자로 누워있던 저는 고개를 들어 엄마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한없이 둥글게 굽어 있던 모습은 꼭 초록이 다 가시고 말려진 낙엽 같았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 순간은 아주 오래된 사진처럼 노란 필터가 씌워진 채 제 마음속을 맴돌았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어디까지 둥글어질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요. 그때 왠지 모르게 눈이 시큰거려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조금 급작스러우나, 여러분은 가을이라는 계절이 우리의 인생에서 어디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사실 저는 어렸을 적에만 하더라도 흔히들 청년기가 저물었다고들 하는, 흰머리가 희끗희끗 나고 두번째 사춘기를 맞이하는 그런 시기가 아닐까,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언제나 시작은 봄이고, 푸를 청靑을 쓰는 청춘은 여름이라 생각했거든요. 가을은 쓸쓸하다는 인식이 너무 강해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 흔한 기억을 곱씹을수록 잎이 떨어지는 게 꼭 나이를 먹는 일만 나타내는 건 아닐 수도 있겠단 믿음이 생겼습니다.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지요. 시詩와 발음이 같은 시월이 존재해서인지 독서의 계절이라고도 합니다. 이 계절을 찬찬히 뜯어보면 참 다정한 구석이 많습니다. 푹신푹신 쌓인 낙엽더미는 아이들의 트램펄린이 되곤 하고, 떨어지는 낙엽을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귀여운 미신도 있고, 풍성한 한가위도 이 계절에 있지요. 어떻게 이 계절이 고독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가을을 진정한 동심의 계절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는 주로 밤이나 새벽의 기운을 빌려서 겨우 감정을 토해내곤 하지만, 가을만큼은 어느 시간대이든 마음껏 공상하고 행동하는 게 이상해 보이지 않는 시기잖아요. 성인이 되어서도 가끔은 인도에 깔린 특정 색의 블록만 밟고 싶어진다거나, 괜스레 서점에 들러 시집 한 권 사보고 싶어지고, 아까운 광경을 보면 스스럼없이 멈추어 사진을 찍는 일 따위를 말이지요. 마땅히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계절. 저는 가을이 여러분들의 출발점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가을이 출발점이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인생에 많은 힘이 되더라고요. 고생할 일은 분명 여럿 닥칠 테지만 겨울 뒤엔 봄이 있고, 너무 찬란한 여름이 있지요. 이렇게 보면 정말 시작에 걸맞은 건 봄이 아니라 가을이 아닐까요? 그리하여 다시 맞은 가을에 우리 모습은 한없이 둥글어져 있을 겁니다. 부서질지언정 낙하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은 가질 수 있을 테지요. 또 다음 겨울은 더 단단히 버틸지도 모릅니다.

  글 재주가 없어 말이 자꾸 장황하게 늘어지네요. 부족한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지루한 안부를 이만 줄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친애하는, 매해 처서가 생일인 엄마에게. 이 글을 읽으며 가을이 조금이라도 좋아졌길 바라며.

  다른 분들도 가을이라는 계절을 좋아하게 되었다면 무척 기쁠 거 같습니다.

  모두 악몽 없이 ‘곤히’ 잠드는 밤을 오래오래 맞이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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