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겐 이 계절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새벽에 맺히는 이슬, 그리고 그 새벽이 오기까지 뒤척이는 불면의 시간이 그것입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일단 절기보다도 환절기를 정확히 맞히는 계절성 알러지가 한 원인입니다. 자다가도 꿈속에서(그리고 침대에 누워, 그러니까 두 곳에서 동시에) 가려운 눈을 긁다보면 잠도 깨버립니다. 그다음에는 일교차로 애매하게 시원해진(=애매하게 더워진) 밤공기도 큰 몫 하고요. 아예 더워버리면 에어컨을 틀면 되는데 애매한 밤공기 때문에 온도 조절에 실패하니 너무 덥거나 너무 추워서 선잠을 자버리는 요즘입니다.

 

  헤비메탈이 자장가로 의외로 적당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죠(실제로 10대 메탈키드 시절 메탈리카 앨범 틀어놓고 잤습니다). 메탈 장르 특유의 반복되는 리프와 리듬이 잠에 빠져들기 쉽게 만든다고 합니다. 뭐든 강렬한 것이라도 반복되면 적응되고 예상 가능한 범주에 들어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아주 조금의 차이도 거대한 해일같이 느껴지는 법입니다.

  바야흐로 변화의 계절입니다. 변화의 시기에는 모든 것이 변화라고 느껴집니다. 백로에 이슬이 맺혀도 변화겠지만 이슬이 맺히지 않아도 오던 것이 오지 않은 것이기에 변화라고 할 수 있겠죠. 매일 반복되던 낮에서 밤으로의, 밤에서 낮으로의 움직임이 이슬로 빛나는 계절, 백로白露입니다.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저는 종종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반년 후면 눈이 쌓인 풍경 속에서 나는 패딩을 입고 있을 거라는 말이지?' 새삼스러운 생각이지만 올해는 유독 의심스러운 마음에 조금 더 진심을 담아 놀라워했습니다. 정말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이었고요. 그러다가 이번주 밤공기가 바뀐 날 확실히 느꼈습니다. 오기는 오겠구나!

  어느덧 9월이다. 나는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오기가 오지 않는다 해서 가을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오기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나의 가을은 달라진다. 오기를 만나기 전의 9월은 어땠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전에도 있었겠지. 오기와 같은 오기가. 그리고 누구에게나 오기가, 일상을 기꺼이 가을로 바꾸어내는 존재가, 언어가, 감각이 있는 것이다. 없다면 부디 이 책이, 이 책의 나와 오기가 당신에게 그러하기를 바란다. 감히.

─ 「작가의 말」 부분, 『나와 오기』

  그렇게 9월 '시의적절'하게 오기는 왔습니다. 네, 시의적절 9월의 주자 유희경 시인과 『나와 오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유희경 시인은 9월 한 달의 시간을 '오기'라는 친구와의 이야기로 채웠습니다. 가을이 되면 찾아오는 오기, 시인이 시를 쓴다면 희곡을 쓰는 오기,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냉면을 시인만큼은 좋아하지 않는 오기. 시인의 9월 이야기 어디에나 오기는 있지만 그 어디에도 (이름처럼) 오기는 머물지 않습니다. 자연스레 우리는 시인이 이야기하는 오기가 누구일까 상상해보게 되지요. 언제나 오는 어떤 것, 어떤 사람. 그러니 언제나 기다림과 반가움, 그리고 아스라함. 

  어쩌면 오기는 가을일 수도 있겠지요. 저는 하나하나마다 유희경 시인과 조금씩 다른 오기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오기와 고양이 알러지가 있는 시인, 바리바리 가방을 싸들고 다니는 시인과 맨몸으로 다니는 오기, 그리고 하다못해 냉면에 대한 취향까지! 어쩌면 그래서 시인과 오기가 잘 어우러질 수 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오기 이야기를 읽다보면 시인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하고요.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마주보고 있는 장기말처럼 나에게도 '일상을 가을로 바꾸어내는' 오기가 있을까, 있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상상하게 되는 밤입니다.

  얕은 잠에 들 때면 꿈은 더욱 생생해집니다. 그리고 꿈 하면 생각나는 책이 몇 권 있고요. 『프닌』(문학과지성사) 『롤리타』(문학동네)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한때 자신의 꿈 일기를 아주 꼼꼼히 기록했고 이 기록은 연구자의 편집을 거쳐 2017년 ‘잠 못 이루는 밤의 꿈들Insomniac Dreams’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나보코프가 그냥 꿈을 기록한 건 아니고요. 그의 꿈 일기는 아주 특이한 생각을 가진 일종의 실험이었습니다. 당시 존 던이라는 영국 철학자가 꿈에 대해, 그리고 시간에 대해 아주 특이한 주장을 했습니다. 나름 아주 복잡한 논리에 근거한 것인데, 단순히 이야기하면 존 던은 특정 조건에서는 시간이 과거-현재-미래라는 기존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도 흐를 수 있다는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이 특정 조건 중에 하나가 꿈이라고도 했고요. 즉, 꿈속에서는 시간이 반대로 흐르기 때문에 우리가 꿈에서 지각하는 것은 일종의 ‘미래의 기억’이 되는 셈입니다. 일종의 예지몽 이론이죠.

 

  일종의 황당한 유사 과학으로 느껴지지만 당시 파급력은 꽤 컸던 것 같습니다. 특히 문학 쪽에서는요. 톨킨은 던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반지의 제왕』에서 중간계와 로리엔 사이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설정을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웰스, 보르헤스, 그레이엄 그린 등이 던의 아이디어를 흥미롭게 받아들였다고 하죠.

 

  나보코프는 던의 이론을 실험하기 위해 꿈을 기록했던 모양입니다. 일종의 문학적 아이디어로 받아들였던 다른 작가보다 훨씬 진지한 태도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책을 편집한 나보코프 연구자 바랩타를로에 따르면 나보코프는 인생 전반에 걸쳐 으스스한 예지몽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중 하나는 나보코프의 동생 세르게이에 대한 것으로 세르게이는 2차세계대전 중 수용소에서 사망했습니다. 나보코프는 친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동생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기 바로 직전에 끔찍한 악몽에 동생이 나타났어. 동생은 침상에 누워 숨을 헐떡이며 고통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어.”

 

  어쨌든 이 책은 문학적 소재를 찾는 이들에게는 흥미로운 자료가, 나보코프의 팬이라면 그의 창작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는 아주 귀중한 텍스트가 될 것 같습니다.

날짜 없음

내 친구 앙드레 마송하고 나는 체조 선수처럼 허공을 돌아다니고 있다. 어떤 목소리가 소리쳤다. “위대한 곡예사들이여, 당신들 모두 내려오시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듣자마자 우린 지평선 쪽으로 몸을 뒤집어 오목한 반구 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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