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한 계절이 지나가나 봅니다. 비가 내린 후 9월 밤은 시원하기만 합니다. 유독 지난한 여름 마무리였습니다. 내년부터는 여름을 5월 초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로 재정의할 수도 있다고 하니, 내년 날씨가 어떻게 되든지간에 체감으로는 올해만큼의 밀고 당기기는 아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어떤 날에는 이를테면 계절 같은 것에 취해 나를 속이며꙳

  최근에 그냥 이유 없이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의 한 소절인데요. OST로 수록된 유명 드라마도 보지 않았고 원곡 가수도 잘 모르는데 어찌하다보니 알고리즘의 간택을 받아 가끔 듣는 노래입니다.

  며칠 전에는 역시 이 노래를 듣다가 문득, 계절 같은 것에 취한다니, 그럼 어떤 계절이 취하기 적당한 계절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딱 이거다 할 계절이나 시기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해서 한국어로, 영어로, 프랑스어로 '도취의 계절' 뭐 이런 식으로 검색도 해봤는데 그냥 알코올중독에 대한 내용만 잔뜩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한영프 언어권 통합 합의된 것으로, 도취의 계절은 따로 없는 것이고요(술로 생각하면 너무나 지당한 결과기도 합니다. 주당에게 술 마시기 좋은 계절이 따로 있던가요, 모든 날씨가 술 마시기 좋은 날씨겠죠). 위의 노래 가사는 사계절 언제나 통용되는 가사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만 '도취되기 힘든' 계절은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올해 여름의 마지막의 마지막 같은 계절. 여름, 혹은 어떤 계절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끝도 없이' 이어지는 한 계절, 그런 계절이 있다면 아무리 달콤하거나 고통스러워도(고통도 취하기 좋은 대상이니까요) 거기에 취하기엔 새삼스러워지고 또 민망해지는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넋을 잃고 시선을 빼앗기는 모든 것의 배후에는 그것의 끝이 어둠으로 자리잡아 명明과 암暗을 그려내며 자기 앞의 있는 것의 그 모든 색채와 굴곡을 두드러지게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은 추분秋分, 한 해를 지나는 시계가 딱 가운데를 가리키는 날입니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어떤 끝을 생각하는 마음도 있기 마련이겠죠. 어쩌면 한가운데야말로 끝과 가장 잘 어울리는 지점이기도 하겠습니다.  

  『불안의 변이』 『형식과 영향력』 그리고 『못해 그리고 안 할거야』까지, 리디아 데이비스의 책이 작년부터 한국에서도 꾸준히 출간되었습니다. 작가의 독특한 매력에 이미 팬들도 다수 생긴 듯하고요.

  리디아 데이비스는 '짧은 이야기short story', 그중에서도 엽편(단편보다도 짧은 이야기 장르)이라 불릴 수 있을 정도로 짧은 분량의 글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그 짧은 분량 안에서 기지를 발휘해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고, 삶의 단편을 기막히게 포착해 그 신비로움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런 작가가 유일하게 쓴 장편소설이 있으니, 바로 『이야기의 끝The End of the Story』입니다.

  『이야기의 끝』은 십여 년 전 실패했던 연인과의 기억을 소설로 재구성하려는 소설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십여 년 전 연애를 글로 쓴다니, 상상만 해도 구질구질하고 신파적인 멜로드라마인가 싶지만 (전혀) 그렇지도 않습니다. 화자는 연인과의 첫만남의 순간이나 상대방이 그에게 주었던 행복을 아름답게 묘사하다가도 그때 자신이 보여줬던 추한 모습이나 상대방의 결점을 잔인하리만치 냉정하게 폭로하기도 합니다. 또,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재구성하려는 소설가 화자의 고뇌를 보고 있자면 우리가 보편적으로 겪을 만한, '기억이 얼마나 실제 과거를 보장하는가' 하는 철학적 고민에도 빠지게 됩니다.

  『이야기의 끝』은 이 소설가 화자가 쓰고 있는 소설, 그러니까 소설 속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묘사하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끝과 함께 시작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묘한 시작 때문인지 『이야기의 끝』은 전개 과정 내내 어떤 '끝'에 대해 줄곧 의식하고 묘사하고 드러냅니다. 마치 화자는 과거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소실점이 되기 직전까지 멀어진 후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는 것 같습니다. 그때 겨우 보이는 것, 어쩌면 연인과의 찬란한 시작, 아름다운 기억, 그것도 아니면 겨우 사진 한 장으로 남은 인상, 이런 것들 너머로 끝끝내 보고 싶은 어떤 것을 보려는 듯 무한히 연장되는 소실점의 끝, 그 주변을 계속 머뭇머뭇거리며 배회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소설을 편집하며 이 작품이 장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실제로 작가는 이 작품을 짧은 이야기로 구상했지만 결국 자신이 쓰고 싶었던 모든 것을 써내다보니 장편 분량이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이야기의 끝』에서 이처럼 '끝'은 고통스러운 동시에 달콤합니다. 한 시기의 끝이 있다는 걸 알아서, 그리고 이미 그 끝에 와 있다는 걸 알아서 고통스럽니다. 하지만 끝에서야 비로소 시작을 돌이켜볼 수 있어서, 그 끝에서 여전히 나에게 돌아오는 무언가가 있어서, 그것과 함께 비로소 무언가가 시작되기에 달콤합니다. 

  문학에서 '지난 사랑을 이야기하기'는 동서를 막론하고 유구한 전통을 가진 소재입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어느 시대, 어느 문화를 막론하고 그것이 인간 정신의 보편적인 어떤 것을 건드린다는 이야기겠죠. 그리고 인간 정신의 보편성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신화라는 장르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사랑을 이야기하는' 신화로서는 당연히,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가 있습니다. 오르페우스 신화를 모티프로 한 몇 가지 작품을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20세기 프랑스 극작가 장 아누이의 희곡 『에우리디케Eurydice』는 신화의 배경을 현대로 옮겨놓습니다. 에우리디케는 유랑극단의 여배우, 오르페우스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식당 종업원입니다. 아주 젊은 이 두 사람에게 사랑은 이들이 지키고 싶은 '순수함'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들 세계에는 순수함을 잃어버린 사람들뿐입니다. 배역을 위해 몸을 파는 배우, 육욕밖에 남지 않은 사랑, 희망을 잃고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뿐입니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극단과 가족으로부터 도망치지만 교통사고로 에우리디케가 죽습니다.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해 오르페우스가 무슈 앙리라는, 약간은 악마를 연상시키는 인물과 거래를 하죠. 허나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장 아누이의 『에우리디케Eurydice』는 현대로 배경을 바꿨음에도 아주 순수한 열망에 가득찬 인물들을 그립니다. 너무나도 순수하고 강렬해 지속되기 쉽지 않은 열망은 시대착오적인 만큼이나 아름답습니다.

  한편 역시 프랑스 영화감독 알랭 레네는 아누이의 이 희곡을 각색하여 영화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영화의 구조는 상당히 독특합니다. 영화 속에서 유명한 극작가는 사망하며 유언을 남겨 오랜 친구들을 자신의 저택으로 불러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그의 작품 <에우리디케>에 오랜 시간에 걸쳐 출연했던 배우들이죠(영화 속 이 연극은 장 아누이의 『에우리디케』를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모이자 극작가의 집사는 이들에게 한 젊은 극단이 무대에 올린 <에우리디케>의 촬영 영상을 틀어줍니다. 영상을 보며 점점 이 배우들은 자신이 연기했던 배역을 떠올리며 감정에 젖어들더니 차츰차츰 한 명씩 일어나 자신의 오랜 배역을 연기하기 시작합니다. 아직 세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모습이, 이제는 노쇠한 배우들의 순수한 눈빛으로 그려지기 시작합니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죽음으로 인해 비가역적으로 잃어버린 연인을 다시 되찾으려는, 필연적으로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시도를 그립니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거기에 더해 연극을 통해 다시 되살아나는 노쇠한 배우들의 모습을 담음으로써 그 시도의 아름다움을 배가하고 있습니다.

• 🚶우리 도시 이야기, 난다의 새로운 시리즈 방방곡꼭! 🚶‍♀️
  방방곡곡. 발음 [방방곡꼭].
  “방방(坊坊) 뛰고 곡곡(曲曲) 걸으며 꼭꼭(‧ ‧) 눌러쓴 난다의 우리 도시 이야기.”(시인 오은)
  '걸어본다' 시리즈 첫 책 출간 후 10년, 그사이 우리는 얼마나 바뀌어버렸는지요.
  그리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선보이는 도시 이야기, 방방곡꼭!
  사진도 그림도 지도도 하나 없는 시리즈라 하겠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단순한 데서 천진함에 점 딱 찍고 시작합니다,
  이경자 소설가의 양양 이야기, 그리고 김상혁·김잔디 작가의 파주 이야기!

• ✨빛난다, 영도 ‘방방곡꼭 영도’ 출판 연계 프로젝트📚
  난다의 방방곡꼭 영도편을 함께 써보아요.
  ‘빛난다, 영도’ 프로그램을 함께해준 모든 이들을 저자로, 한 권의 책을 꿸 계획을 세워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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